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꽃 Jan 15. 2024

사고보다 무서운 건 사람이었다

한국서 잠깐의 쉼을 갖고 우간다로 돌아와서는 4층 건물의 빌라들이 여러 채 있는 아파트 단지서 살게 됐다. 사고 트라우마 때문에 예전 집으로 다시 들어갈 자신이 없었고 사고 현장과는 최대한 멀리, 아이들과 내가 우간다로 들어오기 2주 전에 남편이 이사까지 마친 상태였다.


경유 한 번을 포함해 비행시간이 24시간 많게는 30시간까지 걸려 오는 곳이기에 시차 관계없이 곯아떨어질 법도 한데 쉬이 잠들지 못했다. 겉은 멀쩡해 보이는 아파트여도 방음처리가 조금도 되지 않은 곳이라, 다른 집서 방문을 닫는 소리며 물 사용하는 소리 등 그 소리는 밤이면 더욱더 또렷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사고가 안겨준 트라우마 가운데 하나는 '소리에 대한 공포'였다. 방문이 '쾅'하고 닫히는 소리는 철문을 두드리던 그날의 소리 같았고, 계단을 오르내리던 소리는 그날의 발걸음 소리와도 같아서 창문과 현관 너머로 밤새 확인하느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집으로 찾아오는 대부분의 사람은 아파트 관리인이었음에도 남편 없이 혼자인 날에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그 어떤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죽은 듯 조용히,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고야 안심하고는 했다. 



그리고 이사한 집은 상권과 떨어진 곳이라 집세가 저렴했으나 아파트 단지 내에 놀이터와 수영장 시설도 갖추고 있어 아이들과 걷고 즐기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하지만 누구를 막론하고 검은 피부의 모든 사람이 무서웠다. 특히 눈앞으로 성인 남자가 걸어올 때면 나도 모르게 길 가장자리 쪽으로 몸을 재빠르게 피했다. 인적이 드문 햇살 따가운 시간에 물을 길으러 나온 사마리아 여인처럼 나 또한 그때를 외출 시간으로 삼았던 시간들이었다.


이렇듯 거의 집안에만 갇혀 지내던 나를 남편은 한 번씩 시내로 데려가고는 했는데 5분 이상 정차하는 순간에는 지나가던 보다보다맨(Bodabodaman 우간다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오토바이 택시이며 이를 운전하는 운전자를 가리킴)이 차문을 열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 식은땀까지 흘리며 손잡이를 잡고는 했다. 얼마나 세게 의지했던지 잡았던 손이 빨개지고 아팠을 정도였다.


그만큼 사고가 나에게 준 후유증은 괜찮지 않았다. 하지만 위로와 함께 더불어 전해지는 말들- 이쯤이면, 이만하면 괜찮지 않냐고- 왜 잠을 못 자요?-라는 말들로 나는 오랜 시간 '괜찮음'를 선택해야 했다.




새해가 되고 신형철 님의 <인생의 역사>를 읽고 있다. <아무튼, 우간다 7화>를 쓰다 깊이 공감하는 부분이 있어 남겨본다.


왜 학교에서는 '슬픔학'을 가르치지 않는가. 혼자 공부하다 보면 언젠가는 이런 벽에 부딪힌다. 예컨대,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사람뿐이다,라는 벽. 내가 지금 아는 것은 지금 알 수 있는 것들뿐이어서, 내가 아는 슬픔은 내가 느낀 슬픔뿐이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게 부딪힌 그 불가능의 자리에서 진짜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타인의 슬픔에 대한 공부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무튼, 우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