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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즈 Nov 24. 2023

공격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온다

미국 학회 후기-발단 편

 미국에 도착했다. 발표회장은 미국 오하이오주의 클리블랜드의 다운타운에 위치했다. 검색결과 미국에서 치안이 안 좋기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도시였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대마냄새에 서늘한 기분이 느껴졌다. 미국에 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휴스턴에서 경유해서 날아간 결과 늦은 밤에서야 클리블랜드에 도착했고 지친 우리들은 근처 햄버거가게에서 저녁을 포장해 와 호텔에서 먹었다. 한국에서는 조금 보기 힘들지만 일본에서는 꽤 흔하게 먹을 수 있는 브랜드의 햄버거라서 그리 특별한 기분이 느껴지진 않았다. 사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그런 기분이었다. 그토록 바라던 미국 학회였고 미국에 왔는데 그다지 설레지도 신나지도 않았다. 입국심사를 위해 줄에 서있으면서 모두 영어로 표시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생각했다. 이제는 해외라는 사실만으로 두근거리지 않는구나라고 말이다. 이제는 내가 해외에 있다는 사실이 당연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인생에서 느끼는 즐거움 하나가 사라진 것 같아서 아쉬웠다. 그래도 햄버거와 함께 사온 초콜릿 셰이크는 정말 미국의 맛이었다. 마지막 한 모금을 들이켜면 생각했다. 발표까지 4일이 남았다.




 학회는 총 3일간 진행되었다. 트라이볼로지 콘퍼런스인 TFC 콘퍼런스가 첫째 날과 둘째 날에 행해졌고 전기자동차 콘퍼런스인 EV 콘퍼런스가 둘째 날과 셋째 날에 행해졌다. 나는 EV 콘퍼런스 중 마지막날인 셋째 날에 발표예정이었다. 학회는 오전 8시부터 시작이었고 7시부터 학회 측에서 준비한 조식을 먹을 수 있었다. 베이글과 머핀, 페스츄리들과 과일이 있었고 미국 드라마에서 본듯한 오트밀죽이 준비되어 있었다. 호텔에서 진행되는 만큼 맛도 회장도 고급스러웠고 만족스럽게 배를 채우고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일찍 일어난 보람이 있었다.


 첫째 날, TFC 콘퍼런스 발표들을 보면서 의문이 들었다. 생각보다 수준이 낮았다. 발표 내용을 들어보니 실험 결과에 대한 고찰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질문도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 분명 업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학회라고 들었는데 참가자가 많지 않았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이고 공격적인 질문들이 올 텐데 괜찮겠냐면서 모두가 있는 앞에서 나를 책망하고 걱정하던 교수님이 원망스러워지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까지 힘들게 준비해야 될 일이었던 것인가. 그렇게 까지 욕을 먹을 필요가 있는 일이었던 것인가...


 약간 실망을 한 R군과 나는 흥미가 식은 채로 소파에 늘어져있었다. 보러 가고 싶은 발표도 없었고 아침 일찍 준비해서 온탓에 피곤했다. 그러던 중 포스터 발표인 T군과 S양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본인들의 포스터 발표가 원래 예정일인 마지막날이 아닌 오늘이라는 것이었다. 원래 정해진 섹션이 있었지만, 없어지고 오늘 저녁때 있는 오프닝 파티 때 포스터를 구경하는 형식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섹션 중간중간 쉬는 시간마다 포스터옆에 서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일이 귀찮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S양이 말했다.


 "너는 실수로 포스터 안 넣고 구두로 넣길 되게 잘했네?"


 일본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여,  '실수'와 '포스터'만을 알아듣고 혹시 나도 포스터 발표를 해야 된다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던 찰나 R군이 받아쳤다.


 "아 그건 소문일 뿐이야. 교수님은 처음에 제대로 구두발표라고 말씀하셨었어"


  R군의 말을 듣고 그제야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었다. S양 입에서 그 말을 듣고 나니 그동안 S양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S양은 내가 실수로 구두발표로 넣은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S양은 내가 미국학회 멤버로 발탁되었다는 메일을 보고 용기를 얻어 교수님에게 실험결과들을 내밀었었다. S양의 연구 내용을 본 교수님은 잠시 고민하다 옆에 있는 K상에게 이번 미국학회에 포스터 발표가 있냐고 물었었고 그제야 포스터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교수님이 S양에게 그럼 너는 포스터로 발표하도록 하자고 말했었다. 따라서 내가 발탁되었을 때는 포스터가 있는지도 몰랐던 것이고 S양 또한 그걸 분명히 알고 있다.


 내가 여름방학 때 한국에 가있을 무렵 학교에는 나와 학부 동기인 19학번을 중심으로 나에 대한 소문이 퍼졌고 그 소문의 종착지는 내가 교수님 허락도 없이 사고로 학회에 지원한 것이 되어있었다. 연구실에 들어가자마자 모든 시간과 노력을 태워서 얻어낸 것을 폄하당하니 견디기 힘들었었다. 그때, 대체 외부에 말할만한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긴 했다. 그리고 의심되는 사람이 하나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 누군가에 집착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외국인이고 그는 일본인일 테니 말이다. 이길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S양의 발언을 듣고 나니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그는 나랑 같은 19학번이면서 내가 학회에 가는 것이 달갑지 않은 사람이니 말이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었다. 드디어 내가 발표하게 될 EV 콘퍼런스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구두 발표자인 나와 R군은 EV 콘퍼런스 회장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전날부터 있던 TFC 콘퍼런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큰 규모였다. 200명 가까이 수용가능해 보이는 넓은 강당에 높은 단상과 마이크가 있었고 커다란 스크린이 비치되어 있었다. 그제야 교수님이 걱정하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학부생이 설 무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긴장되지 않았다. 설렜다. 저렇게 큰 회장에서 발표할 수 있다니! 마치 무대 같았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리고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일본으로 돌아갔을 때 '별거 아니었어'가 아닌, '정말 어마어마'했어라고 말할 수 있으니깐 말이다. 내 발표날은 한국 시간으로 수능날이었다. 기분이 묘해지는 날이다. 7년 전의 좌절을 극복해 보자고 다짐했다. 이번에는 날아올라보자고 말이다.



학회 측에서 준비해 준 아침. 매일 이런 아침을 먹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일찍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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