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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즈 Dec 01. 2023

나의 세상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미국 학회 후기-절정 편

 발표가 있는 학회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아침 5시 반에 일어나 준비하여 회장으로 향했다. 회장에는 이미 나와 R군과 같은 섹션에서 발표하는 사회인 박사 T상이 나와있었다. T상은 미국에 본사가 있는 벤처기업의 일본 지사장을 맡고 있다. 석사는 다른 대학에서 마쳤고, 사회인 박사 코스를 우리 연구실에서 시작하였다. 어찌 보면 나와 같은 년도에 졸업하는 동기인 셈이다. T상의 회사는 이번 학회의 펀딩 회사 중 하나였고 홍보용 부스가 마련되어 있었다. 학회 마지막날인 발표당일은 홍보물을 다 정리한 빈테이블 상태였고 우리가 도착하자 T상은 우리를 그 테이블로 불러주었다. 의자가 모자라자 T상은 눈앞에 있는 발표회장으로 들어가서, 문제가 된다면 사과하고 돌려주면 된다며 맨 뒤에 있는 의자들을 갖고 와주었다. 이런 T상의 성격을 우리들은 참 좋아한다. 그렇게 마지막이 될 학회에서의 아침식사를 함께했다.




그런데 T상과 R군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전날과 다르게 음식을 잘 넘기지 못했고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R군에게 아픈 곳이 있냐고 묻자 긴장이 돼서 그런 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미 4번의 국제학회 경험이 있는 R군이었다. 항상 능숙해 보이고 여유 있던 R군이 떨고 있는 모습이 낯설었다. T상에게도 물으니 T상도 매우 긴장이 되어서 그렇다고 한다. 저렇게 발표회장이 클 줄은 몰랐다고 한다. 가히 놀랄 한만 크기이긴 했다. 떨고 있는 둘을 보니 더더욱 이상해졌다. 나는 전혀 긴장이 되지 않았다. 회장의 크기는 나에게 그다지 긴장을 주지 못했다. 사람이 많다고 더 긴장하고 적다고 덜 긴장하고 그러지는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저 커다란 회장이 무대로 보여서 신이 났다. 저 큰 무대에서 잘 해내고 싶었다. 아마 경험이 아예 없어서 무서운 걸 몰랐을지도 모른다.


 나의 발표는 오후 1시 40분이었고 R군과 T상은 중간 쉬는 시간으로 나뉜 뒷 타임인 3시 20분과 3시 40분이었다. 발표날이라 그런지 오전 발표들이 전혀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았고 R군과 나는 오전시간 내내 아침식사를 하던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R군의 긴장을 풀어주려 노력했다. 너는 우리 연구실의 얼굴이라고. 너는 잘 해낼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 교수님과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일어났다. 발표전 최후의 만찬인 셈이었다.


 학회 내내 점심식사는 학회 회장이 있던 호텔 1층 레스토랑에서 해결했다. 클리블랜드는 이미 추운 겨울이었고 교수님이 춥다고 밖에 나가기 싫다고 했기 때문이다. 전날에는 같은 레스토랑에서 햄버거를 시켰었다. 완벽한 미국식 햄버거의 맛이었다. 매우 만족했었지만 중요한 발표전에 기름진 음식을 시키기 꺼려졌다. 나는 몸을 따뜻하게 해 줄 수프를 골랐다. 옆에 앉은 R군과 T상도 수프를 골랐다. 우리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의 긴장은 밥을 먹으며 뒤늦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발표까지 한 시간 남았다고 생각하자 이 상황이 믿기지 않기 시작했다.


'정말 이대로 저길 올라간다고...?'


 이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대로 무너질 순 없었다. 이 긴장감이 모든 것을 삼켜버리기 전에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나는 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설레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맞은편에 있는 교수님에게 갑자기 긴장감이 올라온다고 말했다. 그러자 교수님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맥주를 마시겠냐고 술을 권하셨다. 교수님의 반응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나를 신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정말 열심히 준비했고 이대로 무너질 순 없었다.


 점심시간은 빠르게 지나갔고 내 발표 순서가 되었다. 이제는 올라가야 되었다. 노트북을 들고 어깨를 펴고 당당히 걸어가며 교수님 쪽을 보자 교수님의 눈빛도 꽤나 긴장을 한 듯이 보였다. 살짝 눈인사를 하고 단상 위로 올라갔다. 나에 대한 좌장의 소개가 끝이 났고 간단한 인사말과 함께 발표를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인사말을 듣고 자신감을 얻었다. 목소리 톤이 며칠사이 영어용으로 바뀌어있었다. 예감이 좋았다. 연습한 대로 차분히 발표를 이어나갔다. 문제는 어두운 조명 탓에 대본이 잘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어느 정도 내용을 숙지했지만 대본이 잘 읽히지 않자 급격히 불안해지고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계속 희미해지려 하는 정신을 붙들어 잡았다. 이대로 망할 수는 없다고. 이대로 망할 수는 없다고...


 희미해지는 정신을 붙잡고 관객석으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눈에 들어온 장면은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남았다. 그 많은 사람들이, 세계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모두 내 ppt를 보고 있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내 노력을 모두들 봐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뻤다. 그리고 긴장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다시 붙잡은 맑은 정신으로 무사히 발표를 마무리했다. 박수가 울려 퍼졌고 바로 교수님 쪽을 바라보았다. 만족한 듯 웃음을 지어 보이셨다.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진짜 게임은 그때부터였다. 질의응답시간이 이어졌다.


 워낙 회장이 큰 탓에 질문자 또한 앞으로 나와 마이크 앞에 서서 질문을 해야 됐다. 인도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질문을 하러 나왔다. 그리고 역시나 인도 영어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다행인 건 나는 오래된 미드 시청으로 인도 영어가 익숙해져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미드의 주인공중 한 명이 인도인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질문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고 준비한 내용으로 차분히 대답할 수 있었다. 질의응답까지 무사히 끝이 났고 또 한 번의 박수와 함께 발표가 끝이 났다. 자리로 돌아오자 앞줄에 앉아있던 교수님이 내 쪽으로 뒤돌더니 엄지를 척하고 내보이셨다. 처음 보는 교수님의 찬사에 R군 또한 놀랐고 나는 안도감에 환히 웃어 보였다. 3월부터 시작한 8개월의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쉬는 시간이 되었고 교수님은 아낌없이 칭찬해 주셨다. 정말 잘했다고. 깨끗한 영어로 잘 전달했다고 말이다. 내년 학회도 문제없다고 말이다. 드디어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완전히 기뻤다. 그리고 몇몇 사람이 나에게 다가왔다. 미국 민간 석유 회사인 C사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다가와 명함을 주며 발표 자료를 pdf로 보내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전날 섹션에서 좌장을 맡았던 사람으로 한국인인 듯싶어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고 조심스럽게 한국인이시냐고 물었다. 정확히 국적이 한국인지는 모르겠지만 유창한 한국말로 바로 대답이 왔고 한국말로 얘기를 할 수 있었다. 박시님은 나의 발표와 영어실력을 칭찬해 주었고 이메일로 소통하자고 하셨다. 그리고 다른 회사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박사님도 내게 다가와 많은 조언과 격려를 해주셨다. 벅차오르는 가슴에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고 정신없이 기뻤다.


 미국 현지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에게 칭찬을 받으니 이때까지와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그 평가들이 마치 나 또한 미국에서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나의 세상이 순식간에 팽창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것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더 넓은 세상으로 말이다.


학회가 열렸던 클리블랜드의 Key tower. 고마웠어. 잊지 못할거야


안녕하세요, 유즈입니다.


드디어 미국 학회 발표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올해는 정말 학회로 시작해서 학회로 끝나는 한 해였습니다. 그만큼 이거 하나만을 목표로 열심히 달려온 한 해였습니다.


그리고 제 주변 그 누구보다 브런치 독자님들이 저의 마음고생을 알아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누구에게도 브런치에 올린 에피소드보다 솔직하게 얘기하지 못했으니까요. 첫 에피소드부터 함께해 주신 모든 분께 뛰어가 전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잘 해냈다고 말입니다 ㅎㅎ.


새로운 목표를 위해 달려가며 써 내려갈 앞으로의 에피소드들도 기대해 주세요! 졸업까지 끝까지 함께하자고요! 감사합니다.


유즈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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