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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연 양윤희 Jun 24. 2023

졸정원의 티파티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메타픽션

*신비한 여행          


남편의 회사일로 다시 베이징에서 몇 주를 머물러야 했다. 한 중 합작으로 신동안 상창이라는 번화가에 미국 프랜차이즈를 들여오는 일이라 맺을 계약도 많았고 만나야 할 사람도 많았다. 남편이 맡은 일은 중국 기업과의 조율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한족 친구를 얻었다. 중국인들은 생각보다 매력적이었다. 물론 말을 알아듣지 못해 그런 줄도 모르지만 내가 본 한족들은 잔잔히 흐르는 물처럼 인내심이 강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겸손했다. 옥현 때문에 한국에 머무르기 원하는 나를 남편이 베이징으로 부른 이유는 루원이라는 중국공사 임원 부부와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옥현이 전시회 끝날 때까지만 있다가 들어갈게요. 얼마 만에 만난 건지 알기나 해?”

   심정이 상해서 계속 투덜대었다. 하지만 온화한 사람이 이번에는 완고했다.

   “루원 부부와 밥만 먹고 다시 서울로 가! 티켓팅은 미리 해 놓을 께...... 그 사람이 실세야. 여기 중국 합작 회사에는 꼭 공무원들이 나와 감시를 하거든. 그 사람과 갈등이 없어야 모든 것이 순조로워. 중국인들은 꽌시(관계)를 중요하게 여긴단 말이지. 신동안에 사업권을 따려면 우정을 돈독히 해야 하거든...... 그리고 당신도 좋아할 거야, 아주 괜찮은 친구야!”

    남편의 간절함에 나는 며칠만 머무르기로 하고 베이징으로 떠났다. 베이징 공항은 언제나 느끼듯 회색의 뿌연 공간을 가지고 있다. 저녁때면 어디서 흘러오는지 석탄 냄새 비슷한 탄내가 은근히 코를 감고 올라왔다. 남편은 그날 루원과 함께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다. 퇴근길이니 공항에 들러 나를 태우고 간단한 저녁 식사를 할 계획이었던 모양이다. 중국 향신료 냄새를 몹시 꺼려하는 나는 루원과 저녁을 먹자는 제안에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처음 보는 사람인 데다 한족이니 한국 식당을 갈리는 만무하고 꼼짝없이 정통 중국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활짝 웃으며 악수를 청하는 루원에게 짧은 목례로 인사를 하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중국어로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는 두 사람을 묵묵히 따라갔다. 루원은 중국인답지 않게 서구적인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둥그런 눈은 깊이 쌍꺼풀이 지고 코는 오뚝한 훈남이었는데 전체적인 느낌은 느긋하고 사색적이었다. 루원의 아내는 칭화대를 나온 경제재원으로 상하이 뱅크 북경 지사에 근무한다고 했다.

   “중국인들은 맡 벌이를 하기에 식사는 무조건 밖에서 해결하거든. 아침도 회사  근처에서 죽이나 만두 같은 걸 사 먹지.”

    남편이 루원과 대화 중에 짧게 설명해 주었다. 아마도 내가 없는 동안 둘이서 삼시 세끼를 같이 한 것 같았다.

   “루원이 신선한 고기 집에 데려가겠다는데? 카오야도 잘하는......”

   ‘어디 고급 찬팅에 데려가려나?’ 육식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몹시 피곤했던 차라 반쯤 눈을 감고 그냥 먹는 시늉만 하다가 빨리 사택으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식당 앞이라고 차를 세우는 그들을 따라 내린 곳은 베이징 전통 시장 한가운데에 있는 혼잡한 골목 둔치였다. 사람들이 와글와글하고 온갖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을 하면서 향내와 누린내로 구역질이 올라왔다. 나는 남편을 쏘아보다가 슬쩍 손을 비틀어 꼬집었다. 루원이 영어로 내게 “Are you Okey?”하며 기색을 살폈다. 두 남자들의 기분을 망칠 수 없기에 애써 미소를 지으며 좁은 식당 골목을 따라 들어갔다. 그곳은 식당이라기보다는 동물원에 가까웠다. 비둘기, 오리, 닭 하다못해 공작처럼 날개를 편 이름 모를 새부터 거북이, 뱀, 어린 돼지까지 살아있는 조류, 포유류, 파충류가 작은 상자 같은 철창 안에 빽빽이 갇혀 있었다. 그곳에서 먹고 싶은 고기를 고르면 잠시 후에 요리가 되어 나온다고 하였다. 나는 기겁을 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얼굴이 붉어지며 가슴이 뛰었다. 긴장하는 나를 보며 두 사람이 뭐라 뭐라 대화를 나누더니 남편은 구운 오리를 고르러 화덕 앞으로 가고 루원이 내 어깨를 감싸고 따뜻한 표정으로 “조바!(들어가세요)”한다. 식당 안은 붉은색 벽지에 한자로 복(福)이라는 글자가 거꾸로 모노그램처럼 찍혀 있었다.‘이렇게 끔찍하게 살생을 하면서 무슨 복을 받겠다는 것이야?’ 나는 주변의 평안한 정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바삭하게 구운 뚱뚱한 오리와 마치 소갈비처럼 갈빗대를 드러낸 양념 고기가 나왔다. 의외로 정갈해 보였다. 남편과 루원은 구운 오리를 얇게 저며 춘장과 파채에 돌돌 말아먹기 시작했다. 나는 찹쌀로 빚어 만든 달떡을 주문하여 그 안에 들은 팥소를 걷어 내고 파채를 넣어 먹었다. 잠시 후 루원이 남편과 대화를 한다. 크게 웃던 그는 내게 양념한 갈빗대를 들려주며 우리말로 “소고기, 소고기”한다. 나는 그의 배려를 거절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이고 한 입 베어 물었다. 진한 육수가 입에 퍼지며 짠 양념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단 맛이 전혀 없는 굴 소스 같은데 야들 거리는 맛이 오묘했다. 남편도 “먹을 만하지?”하면서 낄낄 웃는다. 루원이 뭐라 말을 하고 뒤이어 남편이 내게 통역을 해주었다. 부자가 아니면 먹을 수 없는 신선한 고기이며 피부에 좋을 거라고 말이다. 소갈비라고 하기엔 갈비대가 너무 가늘었다. 홍주라는 술에 곁들여 식사를 하면서 나는 중국시를 좋아한다고 루원에게 말했다. “really?”하고 반가워하기에 “of course”라고 답을 했더니 어떤 시인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남편에게 “이 태백이라고 말해줘 봐.” 했다. 그러나 남편이 아무리 이 태백을 읊어도 루원은 그런 시인은 모른다는 것이다. 당나라에는 음유 시인이 유독 많다고 하였다. 결국엔 달과 술을 너무 좋아하여 달구경을 하다가 그것을 잡으러 호수에 뛰어들었다고 하자 비로소 “아 하! 이 백을 말하는구나”하였다. 중국인들에게는‘이백’이라고 알려져 있나 보다. 그럭저럭 식사를 마치고 사택으로 돌아왔다. 루원은 이번 주말에 자신의 아내 옥홍과 즐거운 만남을 갖자고 제안하며 하루 시간을 온통 비우라는 것이다. 남편은 즐거이 웃으며 “커이 커이”라는 말을 연신 해댔다.           


                       졸정원의 티파티     


 “아니 하루를 몽땅 비우라는 거야? 하루 종일 뭘 해? 말도 안 통하는데?” 루원 부부와 긴 시간을 채우는 것이 몹시 곤란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게다가 시장통에 있던 야만 그 자체인 식당이 떠올라 학질이 걸릴 만큼 몸서리가 쳐졌다.  

     “거기가 식당이야? 지옥이지? 내가 정말 당신 회사 일만 아니면 상상으로도   그런 곳엔 안 가겠어......”

      남편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나를 바라보았다.

     “문화 차이야. 뭘 그래? 고기 잘 먹더구먼......”

나는 남편을 쏘아보며 말했다.   

     “바로 손에 쥐어주며 먹으라는데 뱉어? 내가 소고기만 먹는다고 말했나 봐?          근데 그거 소고기 아니지?”

     “아냐,” 남편은 직설적으로 대꾸했다. 그러고 나서 뭐라 말을 하려 입을 오 물 거리는데 손바닥으로 그의 입을 막아 버렸다.

     “제발 말하지 마! 오늘 밤에 토사광란 안 일으키게 하려면......”

우울하고 갑갑한 불쾌감이 들었다.   

      “티 파티를 하자는 거야.”남편이 무심코 말한다.

      “차?”

      “차를 하루 종일 마셔?”어이가 없었다.

      “응!”

남편은 답은 명료했다.  

      “주말이라 회사 운전기사도 쉬어야 해. 저녁에 술 마실 생각하고 택시를 타는 게 좋겠어.”

      남편은 새벽 댓바람부터 서둘러 외출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루원 부부와는 오전 11시에 베이징 시내에 있는 차집에서 만난다고 하였다. 

       “11시에 차를 마셔? 그럼 점심은? 게다가 술은 몇 시에?”

아침부터 서두르는 꼴이 하도 부산스러워 이해가 안 가고 의아했다. 

   “점심 약속은 없어. 아마 차집에서 마작을 하면서 저녁때까지 놀다가 늦  술 마시러 이동하면 될 것 같아.”

   “나는 마작도 모르고 중국말도 모르는데 무얼 하면서 그들 부부와 시간을 보내?”

     긴 시간을 어색하게 보낼 생각을 하니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남편은 뜻밖에 대답을 하는 것이다.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걸 모르듯이 금방 시간이 간다니까...... 당신 책  좋아하지, 책 한 권 읽는다고 생각해. 색다른 경험이 될 거야......”

    책이라는 말에 조금 마음이 누그러졌다. 루원 부부와 하루만 잘 지내면 얼른 서울로 돌아가 옥현의 전시회를 볼 생각에 큰 의무를 치러내듯 비장한 각오로 홍챠오 근처의 작은 차집으로 출발했다. 

    북경의 아침은 푸른빛이 도는 은빛 공간이다. 차들은 느리게 달리고 느닷없는 크낙션 소리가 귀를 깜짝깜짝 놀랜다. 공기 중을 메우는 희미한 술과 음식 냄새는 아침이 밤에게 권력에 내주는 듯 아련한 자비로움이 깔려 있었다. 아침 녘, 그들의 목소리는 작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같기도 하고 까마귀의 꺽꺽거림과도 비슷하다. 시끄럽고 구슬펐다. 택시 대신 빵차를 타고 도착한 좁은 도로 모퉁이에 육중한 나무문으로 불을 밝힌 차집이 보였다. ‘월하’라고 한문으로 쓰여 있는 작은 현판이 보이는데 밖에서 보기엔 전혀 차집 같지가 않았다. 

   ‘여기는 회사 윗분 사모님들과 다녀본 차집과는 사뭇 다르네?’

과시욕이 강한 중국인들은 무엇이든 상징적인 의미를 드러냈다. 예를 들어 차집이라도 겉모습은 고궁을 연상시키듯 화려하고 차향이 강해서 누가 지나치더라도 ‘나는 한껏 꾸민 차를 파는 곳이요.....’라고 입구 자체가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마치 자신의 본능을 숨기고 있는 악어의 눈처럼 푸른 불빛만 껌벅 대고 있었다.   

     “여기가 차를 파는 곳이야?”의아해서 남편에게 물었다. 

     “응...... 한족 차 마니아만 드나드는 비밀스러운 곳이야. 항조우를 패러디했다        나?”

     “항주?”

항주는 내가 가본 중국의 도시 중 제일 아름다운 곳이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감미로운 호기심이 밀려왔다. 남편이 육중한 나무문을 삐그덕 열자 정면에 큰 바윗돌이 나타났다. 깎아 놓은 돌이 사람 키만큼 높아 안쪽이 잘 보이지 않았다. 중앙에 ‘졸정원’(졸장부의 정원)이라는 글자가 새겨있고 바위를 끼고 옆으로 돌아가자 작은 통로가 나오는데 바닥에 찰랑찰랑 물이 흐르고 있었다. 너무 깜짝 놀라 발을 번쩍 쳐들었다. 남편이 웃으면서 바닥이 유리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바닥은 정말 두터운 유리로 되어 있어 그 안쪽에 흐르는 물이 시각적으로만 보일 뿐 젖을 염려는 없었다. 입구와는 다르게 내부는 꽤 규모가 컸다. 테이블들은 작은 배 모양을 하고 호수에 떠있는 조각배를 연상시키며 물 위에 떠 있었다. 천정엔 실제 보름달보다 더 달 같은 노랗고 큰 금덩이 조명이 걸려있고 저 멀리 동방명주 탑이 있는 듯 환상을 일으키며 비파와 얼후 곡조가 차집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이미 배 안에 삼삼오오 사람들이 들어차 있고 중국 전통 의상을 입은 아리다운 여인들이 차 쟁반을 나르고 있었다. 반대편에서 루원이 손을 흔들며 우리에게 손짓을 한다. 바깥은 오전인데 차집 안은 한 밤중 같았다. 루원의 아내는 키가 크고 발랄한 얼굴에 보조개가 매력적인 중국 여인이었는데 나를 보자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얼굴은 낯설지만 친밀감이 일어서 마치 눈이 녹듯이 내 긴장감은 사르르 녹았다. 루원 부부는 모리화차를 권했다. 꽃 향이 진하고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였다. 잠시 후 조금 어려 보이는 한 여인이 나무 쟁반에 작은 황옥주전자와, 나무 찻잔 네 개, 향 편(재스민 꽃잎)이 가득 든 향랑을 들고 왔다. 그녀는 먼저 황옥 주전자 안에 향랑의 재스민 잎을 한 스푼 넣고 우리들 각자에게 찻잔을 놓아준 후 돌아갔다. 잠시 뜸을 들인 후 배 네 척을 사이에 두고 전통 의상을 입은 또 다른 여인이 이상하게 생긴 은주전자를 들고 왔다 갔다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녀가 들고 있는 주전자는 물이 나오는 입이 마치 학의 모가지처럼 쪼뼛하니 무척 길었다. 그냥 긴 것이 아니라 두 테이블 건너편에서 우리 쪽으로 물을 부어도 될 정도로 상당했다. 그녀는 조금 멀리 떨어진 채로 황옥 주전자 몸통 위로 차물을 붓기 시작하는데 김이 모락거리는 뜨거운 물이 주전자 몸통을 적시며 줄줄 흘러내리자 내 몸이 뜨거워진다. 나는 그녀가 주전자 안쪽이 아닌 바깥을 적시며 물을 부어 대서 너무나 놀랐다. 그러다 뜨거운 물이 튀거나 넘치면 어쩌나...... 그러나 그건 섣부른 기우였다. 쟁반 테이블에 배수구처럼 물 빠지는 곳이 있었다. 비단옷의 소녀는 너무나 천천히 주전자 둘레를 적시고 그 보다 더 천천히 몸통 맨 위의 뚜껑부터 차물을 붓는데 물이 황옥 몸통을 타고 부드럽게 내리는 모습을 집중해서 보니 마치 내가 몸을 씻기 우는 착각이 들었다. 따뜻하면서 개운했다. 얕은 호박 빛깔의 통통한 몸통, 그 위로 흘러내리는 물의 애무, 은은히 풍겨 나오는 꽃 편 향기, 비단옷자락의 사각거림, 그리고 네 명의 침묵하는 눈동자, 완벽했다.

   눈을 들어 주변을 살폈다. 천정의 달빛이 우리를 비추고 가느다랗게 들리는 중국의 음악소리, 향기, 그리고 친밀감. 

    루원이 내 찻잔에 가득 차를 따랐다. 한 모금 목에 넘기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초록이 내 목을 타고 심장으로 기어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차 알갱이들이 내 모가지의 모든 세포를 건드리며 천천히 안으로 스며드는 느낌? 박하도 아닌데 화한 청량감이 들었다. 너무나 황홀하여 뭐라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잠시 부족한 중국어를 짜내어 조금 낮은 목소리로 “very good! 헌 하오, 헌 하오(너무 좋아요, 너무 좋아요)”만 연신 해댔다. 루원과 옥홍이 만족하듯 미소 지었다. 우리 넷은 마치 전생부터 이 차를 마시기 위해 이곳에 모여 들어온 것 같았다. 남편이 루원에게 중국 약과를 먹자고 했나 보다. 잠시 후 은쟁반에 홍옥춘 비슷한 진분홍의 약과가 도착했다. 계피로 버무린 작은 꽃 모양의 과자였다. 루원이 뭐라 말을 해서 남편에게 물어보니 과자를 많이 먹으면 차 맛을 느낄 수 없으니 조금만 먹으라고 했다. 약과를 조금씩 녹여 먹으며 우리의 티파티가 시작되었다. 정말 우습게도 한 주전자의 차를 넷이 나눠 마시면 잠시 후 다시 비단옷의 소녀가 뜨거운 차물을 들고 나타나 긴 학의 부리로 충전을 하고 우리를 목욕시켰다. 

   쏴..... 하고 물이 부어질 때마다 쾌감이 전율처럼 피어올랐다. 희한한 일이었다. 루원은 내게 지난번 시장터에서 먹은 갈비가 맛있냐고 물었다. 나는 그를 흘겨보았고 그제야 남편은 그게 거위 고기였다고 털어놓았다. 루원은 내게 이 백이 술안주로 제일 좋아하는 고기가 거위 고기라고 답하며 마구 웃어댔다. 잠 시 후에 옥홍이 자신도 시를 좋아한다며 내게 ‘쉬즈모’라는 중국 시인을 아느냐고 물었다.

   “들어 본 적은 있어요. ‘우연’이라는 시를 책에서 보았어요.”남편을 통해 중국어로 이야기했다.          



            나는 하늘의 한 조각구름

            우연히 그대 물결치는 가슴에   

            그림자를 드리우더라도

            그대 놀라지 마오

            기뻐할 필요는 더욱 없소

            눈 깜짝할 새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 테니


            그대와 나 어두운 밤바다 위에서 잠시 만났으나

            그대는 그대의

            나는 나의 가야 할 길이 있어요

            그대, 나를 기억해도 좋으나

            가장 좋은 건 잊는 것이라오

            우리가 서로 만나 잠시 나눈 빗살의 찬란함은        



옥홍은 내가 영문학을 전공했다고 하자 캠브리지에서 유학했던 쉬즈모라는 중국 낭만주의 시인의 ‘우연’을 읊어주었다. 린휘인이라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과의 깊고 짧은 사랑을 위해 지은 시라고 설명해 주었다. 진한 사랑을 표현한 슬픈 시였다. 우리는 모두 잠깐의 깊은 사랑을 한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해도 계속 만날 수도, 함께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찬란한 사랑을 잊으라고 한다. 그것이 가장 좋은 거라는....... 잊으라, 잊으라, 잊으라.

   대학 3학년 때 할머니가 법주사에서 해주신 중국 기녀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는 옥홍에게 백일동안 기다리다가 의자를 들고 떠난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왜 떠난 걸까요? 우리 할머니는 그게 사랑이라고 하셨어요.”

루원과 옥홍은 남편이 통역해 주는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중국인이니 그 답을 알고 있으리라. 

루원이 차 한 잔을 그윽하게 들이켜고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한다.

   “Love is waiting. Because love is waiting. He has no more than any love for her without waiting”

그의 해석이 놀라웠다. 사랑은 기다림이다. 기다림이 없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러므로 선비는 기다림이 끝나는 날 기녀를 떠나는 것이다. 백일의 기다림이 끝났기에...... 그녀를 향한 사랑이 끝난 것이다. 그의 이야기에 감동하여 한 가지 질문을 더 해도 되냐고 물었다. 중천에 두 달이 뜨는 날이 언제 올 것 같으냐고 말이다. 

   “two moon?, you mean two moons?”

루원과 옥홍은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루원이 장난기 어리게 천장에 달린 달을 가리키며 내게 물었다. 

   “Are there two moons over there? 저기 두 개가 떠 있지 않나요?”

남편도 재미있다는 듯 환하게 웃는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마치 그들만의 세계에는 그런 신비한 일이 일상인양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일생을 호기심과 궁금함을 지니고 전전긍긍했던 문제인데 그들이 너무나 천연덕스런 표정을 짓자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뭔지 모를 부끄러운 소외감이 들었다. 잠시 후 비단옷을 입은 소녀가 다시 은주전자의 찻물을 따르고 우리는 그곳에서 거의 일곱 시간 동안 스무 주전자가 넘는 차를 마셨다. 루원은 하늘에 두 달이 보이는 것은 긴 시간의 중첩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한 마디로 늙어서 달이 흐릿하게 두세 개로 보이는 상황......‘double time’ 나이가 들어 시력이 약해지거나, 사물을 자신의 삿된 욕망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놓아보고 비워볼 때를 비유하는 거라고 말이다. 유유히 흘러가는 시간에 진정으로 자신을 맡기면 우리는 탐하는 것을 무시할 수 있다. 달이 하나 던, 둘 이 던, 보는 이의 자유인 것이다. 무상...... 무상...... 무상......

  ‘사물도 변하고 우리도 변한다.’ 

그들과 차를 마시는 시간은 정말 마치 7초처럼 흘러갔다. 루원과 남편은 마작대신 바둑을 두었는데 우리나라의 백돌 흑돌이 그곳에서는 청옥과 호환옥이었다. 반짝이는 가짜 달빛이 분사되어 바둑돌들이 환상적인 빛을 발했다. 옥홍과 나는 오목을 두며 쉬즈모의 연애담을 이야기 했다. 가슴가득 우정이 올라왔다. 행복감에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저녁때가 다 되어 우리는 산리툰에 있는 루원의 집으로 가 잉어찜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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