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코로나 시대의 메타픽션
*우주가 문을 열 때
닥치는 인연을 신의 목소리로 생각하라는 할머니의 말씀은 삶의 시간을 은총의 순간으로 바꾸는 마법이다. 우리는 인간이고, 인간은 미물이다. 미물인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도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 절대로...... 어느 날 바느질을 하시다가 할머니께서 내게 이런 질문을 하신 적이 있다.
“토끼는 뿔이 있느냐?”
“뿔 달린 토끼가 있어요? 할머니?”할머니가 웃으신다.
“그럼 소는 뿔이 있느냐?”
“왜 그러셔요. 그럼 뿔 없는 소가 있단 거예요?”또 웃으신다.
무슨 말씀을 해주시려고 또 나를 놀래실까...... 의아했다. 그러나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할머니가 그 당시에 설명해 주신 사물을 보는 방식에 대한 지론은 니체의 철학만큼 나를 자유롭게 한다.
인간들은 이렇게 사유한다. ‘토끼는 뿔이 없고 소는 뿔이 있다.’그러나 이 언어 표현은 일시적으로 일어난 망상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비교에 의해서 현상과 의미를 폭력적으로 결합한 것에 불과하다. 토끼는 원래 뿔이 없다. 그런데 이 ‘없다.’라는 인간의 언어는 본래 있던 것이 없어진 것, 혹은 있어야 할 것이 없어진 상태를 언명하는 것이다. 그러니 존재적으로 뿔이 없는 토끼가 들을 말이 아니다. 소의 예도 마찬가지다. ‘소는 뿔이 있다.’ 이것은 없는 것들에 대한 응답이다. 할머니께서는 인간의 언어가 현상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무엇엔가 빗대거나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하셨다. 온전히 실체를 허공에서 떼어내어 설명할 길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진실은 언어를 여윈 상태라고 하셨다. 허공은 길고 짧은 형색과 구부리는 모든 것을 수용하는데 이것들을 제거하면 그만큼의 허공이 남는다. 즉 토끼는 뿔이 없는 것이 아니라 뿔만큼의 허공을 내 준 것이고, 소는 뿔만큼의 허공을 채운 것뿐이다.
“뿔이 있니 없니 따지는 것은 인간들의 일인 게야...... 알겠느냐?”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바라보며 –부처님 말씀이다.-라고 하셨다.
할머니의 말씀은 사물을 존재적으로 볼 것이지 절대 내 관점의 이용수단으로 보지 말라는 이야기셨다. 미물인 우리 인간이 삶을 살아가며 의문이 생기거나 역경에 처할 때 우리 곁에 존재하는 사물의 성향에서 답을 얻는 것은 가장 실용적이며 윤리적인 것이다. 루원과 옥홍에게서 중천에 두 달이 뜨는 의미를 알게 되었다. 밤하늘에 어찌 두 개의 달이 뜬단 말인가...... 아니 밤하늘에 어찌 한 개의 달 밖에 없겠는가....... 달을 보는 것은 우리의 눈이다. 달과 우리의 눈이 하나의 시 공간에 존재하여 그 결이 맞으면 서로를 볼 수 있다. 두 달이 보이는 것은 내가 달에게 공간의 결을 맞출 수 있는 시각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우주가 문을 열어 내게 답을 준 것이다.‘노화!’ 그것이었다. 시간이 간 것이다. 지극히 단순해서 허탈감에 몸이 떨렸지만 실인 즉 우리의 삶이란‘단순함의 묘미’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불수자성수연성
시간이 가고 있다. 그와 더불어 우리의 감각은 용기를 잃고 육신은 남루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지나가는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할머니께서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시려고 자주 말씀 하셨던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 세상 모든 존재물은 본연의 성격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의 관계에 따라 성질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시간은 인연을 치르는 공간이다. 이 말은 나이가 들수록 정말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가 내게는 너무 재미있고, 보드랍고, 살강스러운데 주변의 친구들은 내 느낌을 이해하지 못하는 때가 있다. 또 역으로 친구가 칭찬하는 어떤 이가 내게는 맹숭하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이는 아마도 할머니 말씀대로 인연법에 의해 그리되는 것이니 싫고 좋다는 쓸데없는 감정에 휘둘리거나 괴로워하는 것은 부질없다. 그저 좋은 기운과 정다운 마음을 품어 아름다운 관계가 맺어지도록 노력하고 내 인연을 받아들이면 그뿐이다. 그런 시간조차도 지나간다. 해가 지고 어둑해지는 별의 시간이 오면 하루의 반성과 더불어 아지랑이처럼 이 말이 떠올랐다. 비린내 나는 저녁 식탁을 치우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린 후 가볍게 어깨에 면 숄을 두르고 차가운 책상에 앉는다. 약간의 두통과 식사 후에 오는 위의 더부룩함을 느끼며 커피를 타러 일어설까 말까를 망설인다. 그러다 문득 내게도 몸종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얘야, 커피 한잔만 따뜻하게 타주겠니?” 하고 목청을 돋을 것이다. 하지만 그 존재도 내게 성가실 것이다. 늘 기대고 싶은 대상에게 그 보다 더 큰 값을 치러야 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노란 방안의 불빛이 안온하고 따뜻하다. 할머니도 이 시간이면 둥그런 돋보기를 통해 책을 보셨는데...... 아니 더 나이가 드신 후로는 침묵을 일관하며 심연 속에 그냥 먼지처럼 녹아 계셨지......
담배를 피우시며 먼 허공을 응시하고 아주 가만가만히 앉아 계셨다. 그 심연이 나와는 아주 먼 화성이나 금성쯤에서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그 심연의 주변으로 녹아내려가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나는 할머니의 나이에 무슨 생각을 하면서 존재할까...... 만약 존재가 허망한 것이라면 불교의 이론대로 원래 아무것도 없었던 것인데 욕망으로 인해 생겨났으니 그 욕망을 잠재워야만 다시 참 존재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라면...... 아주 어쩌면 존재는 그 욕망으로 인한 고통의 환을 맛보기 위해 지루한 심연을 깨고 인간으로 태어난 것인데 그 정도로 삶의 고통은 달콤하다는 것인가?...... 달콤한 고통, 불쌍한 존재......
* * *
그렇게 달만이고 있다가
그렇게 달만 지고 있다가
그만 달을 사랑하게 되었다네.
바보처럼!
- 사랑은 아주 높은 곳으로부터 신 자체에 의해 감각이라는 기만과 죄라는 유해성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 따라서 사랑에 빠진 몸은 어김없이 파탄적인 것이다. 소멸과 차가운 몰락, 어쩌면 우리는 몸을 추락하게 하려고 하늘을 고안해 낸 것이 아닐까? ‘몸’은 적나라하게 드러난 우리의 불안이다. 우리는 언제나 의미를 향해 손짓한다. 의미 바깥으로 넘어가면, 그때 우리는 휘청거리기 시작한다. (플라톤이 우리를 놓아버리는구나. 빌어먹을.....) 몸은 바로 의미의 바깥이다.- 낭시에르
*야도
“안경을 벗으면 달이 또렷이 두 개로 보여...... 삼, 사 년 전에는 겹쳐 보였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간격이 멀어지며 또렷이 두 개로 보이네......”
“뭐?”옥현은 상이의 말에 놀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너무나 아름다운 금빛 달 한 덩이가 그들에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녀도 렌즈를 빼고 하늘의 금덩이에 눈을 들이댔다. 처음엔 희미하던 달이 점차 진해지는데 마치 겉 테두리가 녹아 흐르듯 가물가물하게 보이다 겹쳐 보이기를 반복했다.
“난 두 개로 보이진 않고 달이 풀어헤쳐진 계란 프라이처럼 일렁거리는데?”
“그래? 아직은 조금 젊으시군. 난시가 없는 모양이로구나. 난시와 원시가 함께 오면 빛나는 사물이 간격을 두고 또렷이 두 개로 보이거든...... 재밌는 현상이지. 두 배로 멋지든가, 두 배로 재난이던가......”
“................... ”
상이가 수줍은 듯 누런 봉투를 내밀었다. 48색의 왕자표 크레파스...... 골동품처럼 시간에 쪄들은 사물이 마치 새것처럼 빛났다.
“이제야 주었네!...... ”그는 겸연쩍게 불쑥 말을 쏟아 내었다.
“뭘?”
“숨바꼭질하다가...... 보았어......, 네가 누나 크레파스...... 베어 물던 거...... 분홍색이랑 은색...... 맛있었냐?”
옥현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유난히 방이 많던 그의 집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일본식 가옥인 그의 집은 골목골목 다다미방이 조르라니 터널을 통과하듯 연결되어 있었다. 어두침침하고 좁은 복도를 마주 보며 방마다 꽃무늬가 자잘하게 프린트된 인견 이불이 납작하게 깔려 있던 기억이 난다. 마치 방석 같은 기능의 보료였다. 특이한 것은 방마다 꽃무늬가 달랐다는 점이다. 초록색 풀꽃, 분홍색 백일홍, 노란 안개꽃...... 그녀는 정갈한 그의 집 방들을 기웃거릴 때마다 마치 다른 나라를 여행하는 듯 새로운 흥취에 빠지지 않았던가?
“넌 참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어, 그리고 너의 그림 그리는 모습은......”
상이가 수줍은 듯 말했다.
“참 예뻤다.”
그가 그녀를 기억하고 있다.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도, 같이 그림을 그린 적도 없지 않던가?......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이었다. 학교에서 파하자마자 그녀는 빨간 장화에 강아지가 그려진 노란 우산을 쓰고 상이네 집으로 놀러 갔다. 비가 오는 날이라 언니와 고무줄을 할 수는 없었다. 밖에서 아이들과 놀기를 포기한 상이와 민이가 다다미방으로 어슬렁거리며 들어왔다.
“누나...... 심심하다.”
“너희도 집짓기 같이 해......” 언니의 명령에 두 형제가 다가와 앉았다. 팬터마임 같은 집짓기였다. 언니와는 이야기를 만들어 가며 집을 짓는 일이 어렵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상이와는 대화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한 개의 블록을 올리면 곧바로 그는 그 보다 더 크고 무거운 블록을 그 위에 겹쳐 놓았다. 그녀는 무거운 블록을 이고 있는 작은 블록이 마치 자기 자신 같아 어깨가 축 늘어졌다. 상이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쏘아보며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상이와 옥현이 쌓은 집은 언제고 무너지기 일보직전으로 위태로웠다.
“누나... 우리 숨바꼭질하자... 집짓기 재미없어......”
막내인 민이가 답답했던지 언니를 보채였다.
“그래, 그러던가...”
옥현은 숨바꼭질이 어려웠다. 우선 상이네 집은 방이 많았다. 골목골목 어두운 복도를 지나 연속해서 마주 보는 방들과 이층으로 올라가는 좁은 계단을 뛰어오르기는 힘이 부쳤다. 하지만 까만 안경테 너머 상이의 눈은 장난기 어린 웃음과 결의에 찬 야비함이 이미 가득 차 있었다. 상이와 하는 숨바꼭질에서 그녀는 늘 술래가 되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상이와 민이는 약속이나 한 듯 주먹을 내었고 그녀는 그 긴 시간을 두 아이를 찾기 위해 서성거려야 했다. 운이 좋아 누구 하나를 찾는다 해도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찾은 아이보다 먼저 술래의 집으로 뛰어가 야도를 해야 한다. “야도” 얼마나 오랜만에 불러보는 단어인가......
나는 너 보다 먼저 야도를 할 수가 없었어......
넌 빠르고 힘이 셌어......
응... 알아...
그와 민이를 찾아 그녀는 몇 번이나 아래 위층을 오르락 내리락 했던가...... 닫혀있는 방문을 열고 다다미방으로 들어가 미닫이 장롱 문을 여는 것이 옥현에게는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두 형제는 늘 같은 장소에 함께 숨었다. 열어진 틈 사이에서 그 둘을 살짝 본다고 해도 그녀는 ‘찾았다.’라고 소리를 치며 좋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소리치는 순간, 아이들은 그 좁은 틈바구니에서 우악스럽게 튀어나와 덮칠 듯 그녀를 밀치고 쿵쾅거리며 먼저 술래의 집으로 냅다 뛰어 ‘야도’를 하고 큰 소리로 그녀를 조롱하기 일쑤였던 것이다. 언제나 일방적인 게임이었다. 그런데도 비 오는 날이면 상이는 어김없이 새초롬한 눈으로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는 상이와 치렀던 마지막 숨바꼭질이 생각났다. 그날은 유난히 두 형제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아래 위층을 몇 번 오르내리고 붙박이장의 도르래 문틈을 샅샅이 뒤졌지만 두 형제는 보이지 않았다. 힘이 빠진 그녀는 숨바꼭질을 포기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언니가 그리다 만 그림과 상이 아버지가 외국에서 사 온 68색 크레파스가 펼쳐 있었다.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크레파스 틈바구니에 쪼그려 앉아 아름다운 색의 향연에 눈을 묻었다. 황홀했다.
그녀는 그림 그리는 것이 행복했다. 할머니가 늦게까지 신당에서 손님들의 점사를 봐주는 날은 방 안에 홀로 엎드려 갖가지 꽃 그림을 펼쳐 그리곤 했다. 할머니는 그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동그란 왕관을 쓴 왕자가 스마일처럼 웃고 있는 24색 크레파스를 사주셨다. 파란 바탕의 골판지에 들어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까지 하루 종일 심우도와 천도복숭아를 그려댔다. 색칠은 들뜨고 신나는 일이었지만 그녀의 욕망은 늘 크레파스의 색을 압도했기에 그리는 것은 결핍의 연속이었다. 그녀에게 어린 시절의 그림은 뭉뚝해진 크레용의 너덜거리는 종이가 도화지에 닿던 거북한 느낌과, 없는 색을 두리번거리며 찾는 불안의 연속이었다. 상이네 꽃무늬 이불을 상상하며 그림을 그리는 날은 여지없이 노랑과 핑크가 바닥이 났다. 할머니는 그녀가 특정한 색깔만 없애서 또 다른 새 크레용을 사줘야 하는 것에 좀 언짢으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비싼 24색 크레용은 12색 제일 색이 없는 크레파스로 대체되었다. 그녀는 속이 상했다. 12색에는 그녀가 표현하고픈 색이 부족했다. 개나리색도 연두도 없었다. 진한 노랑과 초록이 떡 가로막고 있었다. 그런데 언니가 쓰는 크레용은 68색이라니...... 그녀는 그걸 보자 숨이 멈출 것 같았다. 황토색, 밤색, 그다음에 황금색이 있었다. 반짝이는 황금색, 그리고 회색 다음에 반짝이는 은색...... 그녀는 눈이 깜박여지질 않았다. 핑크도 세 가지나 다른 방법으로 재잘거리며 그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날 가지고 그려봐! 난 별이 될 수도 있고 달이 될 수도 있어! 선녀들이 날리는 은 색 눈가루도...... 날 만져봐!” 그녀는 정말 그런 말을 들은 것 같았다. 한 번 만져보고 싶었다. 살짝 만진 후에 옥현은 핑크와 금색을 입에 물고 일 센티 정도 물어뜯었다.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그리고는 조각들을 뱉어내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크레파스를 조금만 집에 가져가고 싶었다. 입에 침이 고이다가 입술 가장자리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녀는 겁이 나고 당황하여 자신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던 중이고 상이와 민이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망각했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 갑자기 쿵쾅 거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위층에서부터 돌진하여 내려와 있는 힘껏 방문을 열어젖히며 상이가 들어왔다. 얼굴은 실룩거리고 눈에는 화가 잔뜩 들어 있었다.
“왜 찾질 않아? 너 술래 아니야? 지금 뭐 하는 거냐?”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상이를 바라보았다. 그가 말할 때마다 정수리 쪽 머리가 풀썩 풀썩 나풀거렸다.
‘내가 널 어떻게 찾아? 방이 이렇게 많은데...... 그리고 너희 집이잖아, 난 잘 모른단 말이야......’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녀는 침을 삼키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와 외롭게 사는 그녀가 유일하게 놀러 가는 상이네 집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렸어도 눈치는 빤했다. 그리고 그것이 미국에 가기 전 상이와 놀았던 마지막 추억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상이는 그녀가 크레용에 침을 흘리고 조각내어 가져갔던 어린 시절을 얘기하고 있었다. 유난히 욕심났던 언니의 펄 핑크와 펄 금색...... 부끄러운 어린 시절의 감추고 싶은 비밀이었다.
“꽃과 별을 예쁜 색으로 칠하고 싶은데 열두 색 크레파스에는 빛나는 색이 없었거든. 언니가 많이 부러웠어.”
그녀가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사랑의 눈으로 옥현을 바라보다 상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이유에서만은 아니고 미국 가서 열심히 미술 공부 한 후에 훌륭한 화가 되라고 꼭 전해주고 싶었어.”
옥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뭇거렸다. 상이는 그녀의 잊을 수 없는 부끄러움을 알고 있었다. 아련한 고마움이 명치끝부터 뇌 쪽으로 밀려 올라왔다.
“네 원대로 예술가도 되었고 핑크와 금색은 잘 먹어 줄 테니 너도 내 소원 들 어줘.”
“소원?”
“그래......”
“들어줄 수 있는 거면 들어주지.”
“나, 전시회 끝나면 뉴욕으로 돌아가. 뉴욕에서 사진들 정리해서 다시 프랑크프루트로 가야 하거든.”
“응......”
“가기 전에 너랑 왈츠 추고 싶어. 나타샤 왈츠”
“졸업 운동회 때 짝꿍 돼서 추려던 춤 말이냐?”
상이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무심한 듯 미소를 띠웠다.
*키스: 기껏해야 짧은 순간의 환희심
워커 에반스의 사진전이 끝나고 ‘빛나는 것들’이 전시되었다. 북경에서 돌아온 나는 한국 빌딩 전시장으로 바삐 갔다. 그러나 그보다는 옥현이‘중천에 두 달 뜨면’의 비밀을 알아냈다고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무슨 소리야?”흥분해서 물었다.
“상이를 만났는데 그 애가 하늘에 둥근달이 또렷이 두 개로 보인다는 거야.”
“뭐?”
“한참을 생각해 보니 성림 할머니 말은 문영이 네가 나이를 많이 먹어서 뭔가 삶의 열정에서 놓여났을 때 차분한 기운으로 그 아저씨를 보라는 말이었어. 중천의 두 달은 네 시력이 약해졌다는 걸 의미한 거지. 긴 시간이 지난 후에 만나라는 거야. 너 난시잖아. 어릴 적에 성림 할머니가 신당에 오셔서 우리 할머니와 이야기 나누시며 글씨며 사물이 확연히 겹쳐 보인다고 걱정하신 것도 기억났어...... 너도 안경 벗고 밤하늘의 달을 자세히 한 번 봐.”
북경에서의 일들과 오버랩이 되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하늘이 내게 답을 주기 위해 여러 곳에서 한꺼번에 신비로움을 흘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생각해 보니 정말 그럴 수도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사물이 두 개로 겹쳐 보인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난시는 유전이지 않은가? 책을 너무 많이 보아서 일찍 노안이 온 거라 생각하고 여러 개의 안경을 맞추었다. 이제는 안경이 없이는 사물의 상이 너무 입체적으로 보이고 흔들려서 인식하기가 곤란했다.
‘아...... 할머니! 그 뜻이었어요? 선녀와 나무꾼처럼 아이를 셋 낳기 전 까지는 절대 날개옷을 주지 말라는 당부였나요? 손녀딸인 제가 삶의 모험을 떠날 수 없이 나이가 많이 든 후에나 첫사랑을 한 번 만나 보라는 주술이었어요?’
너무나 허탈했다. 그러나 베이징의‘월하’에서 루원 부부에게 들은 답도 바로 그것이지 않은가...... 시간의 중첩...... 그 사실을 알자마자 이제 아저씨를 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맥 풀린 감정이 일었다. 할머니와 방울 할머니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시며 만족한 듯 나를 바라보는 얄미운 모습이 환히 떠올랐다.
“이제 나이가 든 거야. 달의 나이. 할머니 뜻대로 되었구나. 나쁜 할머니.”
“그래, 그러니까 이제 아저씨를 찾아봐. 만나보라고. 지금도 그렇게 좋은 지 말이야,”
옥현이 마치 인생 최대의 수수께끼의 비밀이라도 발견한 듯 들뜬 얼굴로 몸을 바싹 붙여왔다.
“이제는 보고 싶은 생각이 안 들어!”
진심으로 그런 마음이 올라왔다. 쓸쓸한 마음과 속은 듯 분함이 함께 밀려왔다. 혼자 있고 싶어서 옥현의 곁을 떠나 사진이 전시되어 있는 홀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사진전 한가운데 형형색색의 날개를 활짝 편 아폴로 같은 기사가 높은 첨탑에서 날아오르는 유채화가 한 점 걸려 있었다. 흑 백 나무 사진 한가운데 강렬한 색감의 날개가 펼쳐 있으니 둘의 대비가 큰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 보였다. 그 아래는 안젤라 카터의 ‘키스’라는 조각글이 적혀 있었다.
템벌레인 부인은 너무나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매우 정숙하고 지혜로웠다. 그녀는 자신에게 키스를 요구하는 건축가를 궁전으로 불러들여 바구니를 보여주고 마음대로 삶은 달걀을 골라 먹게 했다. 이 달걀이나 저 달걀이나 신선하기만 하면 맛은 다 똑같습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제 시녀들 중 마음에 드는 여인과 키스하시고 저는 건드리지 말아 주세요... 잘 알겠습니다. 잠시 후 건축가가 쟁반에 잔 세 개를 실어가지고 돌아왔다. 세 잔을 차례로 마셔보십시오. 부인은 세 번째 잔을 마셨을 때 기침을 하며 액체를 내뿜었다... 왜냐하면 세 번째 잔은 물이 아니라 보드카였기 때문이다. 보드카와 물은 색이 똑같지만 맛이 완전히 다릅니다...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템벌레인 부인은 건축가에게 키스했고... 그 후로 남편을 거절했기 때문에 그것이 들통 나 채찍으로 심하게 맞았다... 템벌레인 장군은 크게 노하여 사형집행인을 건축가에게 보냈고... 건축가는 자신을 죽이러 오는 소리를 듣자 높은 첨탑으로 올라가 날개를 활짝 펴고 페르시아로 날아가 버렸다. 이 이야기는 어린아이의 크레파스상자처럼 화려한 색채와 기하학적인 색채를 지닌 이야기이다. 템벌레인 부인은 오늘 저녁 남편을 위해 머리를 촘촘히 따고 이 우즈베키 시장에서 저녁거리로 순무를 샀을지 모른다. 어쩌면 남편을 떠난 후 이 시장에서 삶을 이어나갔을지도... 칼라꽃을 팔면서....
“키스? 저건 뭐니?”옆으로 다가온 옥현에게 현란한 페르시아의 색을 가리키며 내가 물었다.
“마이클이 내 사진 전시회에 선물로 준 데모 픽쳐야. 사실 사진 전시회에 유화를 걸어 두는 경우는 없는데...... 현란하게 날개를 활짝 펴고 첨탑 위에서 날려고 하는 건축 기사처럼 예술의 세계에 뛰어 들라는 상징이라나?”
유채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나도 모르게 눈이 뜨거워졌다. 페르시아로 날아갈 건축가와 한 번의 키스를 위해 시장터에서 칼라 꽃을 파는 여인으로 전락한 아름다운 팀벌레인 장군의 부인......
하지만 아름답다. 아름답다. 아름답다.
‘그래! 어쩌면 할머니가 말씀하신 세 번째 사랑의 정의, 기껏해야 짧은 순간의 환희 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저런 것인지도 몰라. 우리는 잠깐 동안의 짜릿한 사랑을 위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지......., 하지만 짧은 순간의 환희를 위하며 자신의 무언가를 후회 없이 버릴 수 있다면...... 사랑하고 페르시아로 홀로 날아간 환상의 연인이라도...... 칼라 꽃을 팔며 연명하더라도...... 옥현이가 긴 그리움 끝에 한 번의 나타샤 왈츠를 추고 싶어 하는 것도...... 모두 다 짧은 순간의 환희심과 바꾸는 상놈의 영역 때문인 거지.
자동인형처럼 웃음이 술술 풀어져 나왔다. 끝도 없이......
옥현이 곁에 다가와 내 손을 꼭 쥐었다. 말없이 옆에 가만히 존재하는 옥현을 돌아보며 내가 물었다.
“상이가 나타샤 왈츠 춰준다고 했어?”
“응, 상이가 다리가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열심히 연습해서 춰준다고 했어. 다음번 동창회는 우리 학교 강당에서 할 거래. 그때 추면되지.”
순간 상이의 마음이 어떤 상태이기에 그런 약속을 했는지 유추할 길이 없었다. 애가 끊어질 듯 가슴이 조여 왔다. 상이는 옥현이 신당동을 떠나던 날 크레파스를 선물로 주려고 따라나서다 사고를 당한 것이다. 학교에서 옥현의 출국 얘기를 해준 것은 바로 나였다. 옥현은 상이가 오기 바로 직전에 친할머니네 차를 타고 떠났고 상이는 자전거를 타고 급히 차를 쫒다가 정차하는 버스에 치고 말았다. 한쪽 다리가 자전거 바퀴에 휘감겨 버스 안으로 들어갔다. 상이 부모님은 애간장을 끊어내듯 괴로워하셨지만 그 애가 옥현을 따라가다가 사고를 당한 줄은 모르고 계셨다. 그 소식을 다음 날 학교에서 들었는데 처음 엔 모두 집 앞에 나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걸로 알고 있었다. 사건의 전모를 아는 사람은 나와 방울 할머니뿐이었다. 방울 할머니는 상이가 옥현에게 줄 게 있다고 찾아왔다가 급히 차를 따라간 것을 보신 것이다. 모든 것이 청천벽력 같이 동네를 때렸고 우리 모두는 침울함에 젖어 헤어나질 못했다. 그러나 방울 할머니가 옥현에게는 절대 상이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당부하셨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방울 할머니는 옥현의 부모가 사주에 서로를 상처 입히는 형살이 있어 사고를 당한 것인데 옥현과 상이까지 그런 운명일까 두렵다고 하셨다. 우리 집에 오셔서 대성통곡을 하며 외할머니 앞에서 괴로워하시던 걸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세월은 지나갔고 모든 것은 파도처럼 물거품처럼 증발되었다.
어쩌다 그대 물결치는 가슴에 비추이더라도
놀라지 마오
기뻐할 필요는 더욱 없소
둘 다 눈 깜짝할 새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 테니
그대와 나 캄캄한 밤바다 위에서 잠시 만났으나
그대는 그대의, 나는 나의 가야 할 길이 있소
그대, 나를 기억해도 좋으나,
가장 좋은 건 잊는 것이라오.
우리 지금 이곳에서 만나 서로 나눈 찬란함을
옥현과 상이가 한 달 후에 있을 다음번 동창회에서 나타샤 왈츠에 맞춰 춤을 잘 출까? 나는 그것을 예견할 수가 없다. 절뚝거리며 추던, 한 땀도 움직이지 못하던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들의 마음이다. 서로를 좋은 이로 그리워하며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마음, 그것만이 전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