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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연 양윤희 Jun 27. 202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메타 픽션 두 달 뜨는 밤------연재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옥현의 전시회에 다녀온 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보라는 그녀의 말이 계속 생각났다. 할머니가 말씀하신 ‘두 달 뜨는 밤’의 의미를 알게 된 지금 그를 만날 것이냐 말 것이냐의 갈등은 시시포스의 바윗돌처럼 끊임없이 가슴을 타고 굴러 내린다. 사실 긴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사람이 어린 시절 몇 해 안 되는 풋사랑을 절절이 기억하여 나를 반갑게 만나줄지에 대한 의문도 삭힐 수 없었다. 

       ‘만날까? 말까! 만날까? 말까! 만날까? 말까!’

포송령이 얼음처럼 차가운 책상에 앉아 고심을 하듯 한참을 생각하다 책장으로 눈이 갔다. 무언가 어렵고 결정하기 힘든 게 있으면 주변의 사물이 답을 줄 거라는 할머니의 말을 떠올리며 책꽂이에서 닳고 닳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꺼냈다. 겉장을 들추어 보니 안쪽 표지에 “문학은 잃어버린 시간을 구해낸다”라는 대학 시절의 초록색 메모아가 적혀있다.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눈에 띄는 구절들을 읽어 나갔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길고 긴 서술이 얽히어 웬만한 인내심을 갖지 않고는 작가의 의식과 동행하기 어렵다. 대학 3학년 영미 소설 시간에 잠깐 다룬 적이 있지만 그때는 작품 속에 내재된 사유의 빛을 낚아챌 만큼 삶의 경험이 풍부하지 않았다. 이제 많은 시간이 지났고 나는 프루스트가 산 나이보다 더 많은 나이를 먹었다. 그가 이야기하는 서사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시간이 맞추어진 것이다. 이 책의 첫 페이지는 진노랑이 주황으로 변신하는 작열하는 촛불 아래서 병약한 마르셀이 사색에 드는 장면이다. 잠이 오지 않는 밤, 하인들의 발자국 소리, 내일을 기다리는 조급함, 안달하며 기다리는 어머니의 굿 나이트 키스, 그리고 방금 읽은 책의 상흔이다. 그 장면을 어찌나 생생하고 만져질 것 같이 묘사했는지 마치 내가 그의 옆에 누워있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프루스트는 마치 물질의 본질과 원리를 연구하는 물리학자처럼 현실과 상상 그 사이를 오가며 마음의 유동을 구체적으로 관찰했다. 시 공간에 펑크를 내고 그 구멍 안에 블랙홀 같이 빠져나올 수 없는 길고 진한 사유의 독백을 끝도 없이 풀어낸다. 나는 이제 그의 서술에 반하려 한다. 실제 사건은 별로 없다. 만남도 사랑도 싱겁다. 그런데 싱겁고 소소한 일들을 엿가락처럼 늘려 초를 만들고 거기에 불을 붙인다. 영롱한 촛불이 주변을 환히 밝힌다. 

   ‘아. 그래! 우리의 삶은 그냥 뾰족하게 부서진 이야기들의 파편이구나. 허깨비들의 판타지. 착각의 파노라마’ 이야기의 현실성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나의 판타지와 너의 실재가 만날 수 있는 하나의 접점만 있으면 그만이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많은 가능성이 이 삶을 채우느냔 말이다. 오류와 억지, 남루한 설득. 프루스트의 서술은 문학만이 모든 것에 가치를 부여한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모든 이야기이며 아무 이야기도 아니었다. 삶 자체이지만 상상의 묘사가 절반 이상이다. 마치 내가 긴 세월 동안 아저씨를 상상했던 것과 흡사하다. 이야기 중에 기다림에 관한 소고가 나를 매료시킨다. 각 각의 상황은 기다림의 상태, 흥분, 고통, 이로 인한 현실의 무관심을 보여준다. 기다림은 오히려 현실을 판타지의 영역으로 바꿔치기한다. 미래에 도래할 만남에만 모든 현재가 바쳐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다리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으니 허상을 위하여 실재를 저당 잡힌 셈이다. 왜 연인들은 이별한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기다림에서 벗어나려 할까? 불안이 없는 완벽한 상태로의 복귀를 희망하는 것일 테지만 사실 이것은 남는 게 없는 어리석은 셈법일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화자 마르셀은 더 이상 알베르틴에게 집착하거나 기다리는 불안을 견딜 수 없어 그녀를 자신의 집에 가둔다. 그런데 여기서 기다림의 이중성이 그의 계획을 좌절시킨다. 기다릴 것이 없는 상황은 곧바로 권태라는 불만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알베르틴과 거리가 없어지자 사랑의 짜릿함, 즐거운 기대감, 모험은 사라진다. 즉 기다림은 그 자체로 쾌락을 품고 있었다. 이제 마르셀은 그녀와 헤어지기를 기다린다. 프루스트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만나고 싶다는 것은 그의 내면에서 자신이 꿈꾸던 것들을 확인받고자 하는 마음의 충동인데 만일 그의 존재가, 부재했을 때 꿈꾸었던 것을 망쳐버린다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럼 나는? 

왜 두 달 뜨는 밤을 기다린 것일까? 그의 내면에 내가 꽃피운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것일까? 한 때 열망했던 그와 닿고 싶던 원을 이루고 싶은 것인가? 어린 시절의 감정을 소환하여 그때의 존재를 진하게 느끼는 시 공간의 배려를 경험하고 싶은 걸까? 하지만 프루스트의 조언에 따르면 그것들은 절망할 것에 대한 유예이지 않은가 말이다. 그를 만나는 것이 그의 부재보다 더 견디기 힘든 상황이 되면 지금껏 삶을 위로했던 상상의 쾌락은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일까!



                       *에필로그두 달 뜨는 밤           

  


 달이 밝다. 요요 놀이를 하듯 금덩이 두 개가 하늘에서 일렁거린다. 두 달 밤이다. 어스름이 가득 한 가을 영창 밖에 달빛을 머금은 은행잎이 점묘화를 그려놓은 듯 흐드러지게 펼쳐있다. 나는 이제 그를 만나러 가려한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경주처럼 절대 앞지를 수 없는 운명을 가로질러 먼저 내가 그곳에 도착할 것이다. 그가 오기 전에 먼저 가서 그를 기다리리라. 프로스트는 두 갈래 길을 관망하며 가지 않은 한 길에 대한 아쉬움을 사유로 추측했지만 나는 천 번의 망설임을 지나 잊혀지지 않는 욕망을 되새김질하며 이미 가보지 않았던 나머지 한 길로 발을 옮겨보려 한다. 그도 어딘가에서 나를 만나러 오는 중일 것이다. 인생의 반을 기다리고 숨죽이며 오늘을 기다려 왔다. 그를 만나면 내 모든 삶을 집약시켜 오늘이라는 한 점으로 이르게 한 이유를 환히 감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만족스럽고 그는 행복할 것이다. 운명은 늘 우리를 기만하고 낯설고 이상한 것들 속에 머물게 한다. 하지만 우리의 육체를 머물게 할 뿐 우리의 사유를 못 박아 두지는 못한다. 나는 운명을 거슬러 볼 것이고 그도 그의 운명을 떠나 이곳으로 올 것이다. 이제 그를 만나면 나는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고 헤어지지 않을 것이며 그의 손을 잡고 길고도 달콤한 사랑을 나눌 것이다. 인간의 삶을 자기 살 속에 처박혀있는 있는 인간이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결국은 욕망이 시키는 대로 육신을 너덜너덜 끌고 다니다가 돌발적인 사태들에 치여 피투성이가 되면 그제야 왜 욕망했는지 어떻게 벗어날 것인지 근원적인 질문을 조금 떠올려 볼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자기 살과 영혼이 원하는 미망의 신기루를 향해 눈을 돌리겠지. 나는 생의 반을 할머니의 바람대로 조용히 지내왔다. 명을 유지하고 달달 봉사처럼 더듬거리며 계산하거나 헤아리지 않고 나무인 듯 뿌리를 내리며 조용하게 말이다. 그리고 이제 할머니께서 말씀하셨던 중천에 또렷이 두 달이 뜨는 날이 왔다. 시월 가을 보름 날 휘황하게 둥근 두 개의 보름달. 그 광경에 너무도 놀라 눈을 부비대었다. 할머니의 의중은 천기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아니라 나에게 부여된 세속적인 시간의 긴 중첩이었다. 사랑하는 손녀딸이 달의 나이를 먹어 지긋한 시선으로 밤하늘을 바라볼 때 눈동자에 맺힐 두 개의 상흔, 원근법적 소실점이 망막의 상과 분리되어 빛이 입체적으로 반사되는 상황. 하지만 돌이켜보면 나의 이런 삶은 속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솟구친다. 울먹한 마음과 슬픈 아쉬움이 감정의 가장자리를 건드린다. 

   그를 만나러 가려한다. 이 결정을 내리기까지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어쩌면 그를 만나는 순간 갈기갈기 찢길 운명의 오르페우스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는 내가 너무 낯설어 에우리디케처럼 먼 기억의 하계로 빨려 들어갈지 모르지....... 아니면 독하게 사랑을 고집한 상으로 별로 승천되는 디오니소스의 성은을 입게 될까? 메데이아처럼 말이다. 하지만 에우리디케를 다시 하계로 잃어버리는 처절한 오르페우스가 되던 디오니소스의 은총으로 여신으로 승격된 메데이아가 되던 아무 상관도 하고 싶지 않다. 어떤 결말이던 나에겐 똑같으니까. 나는 그저 내 삶을 살아낸 것이고 내 운명을 보고 느끼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제 그가 보고 싶다. 정말 궁금하다. 원래 인간이란 자기 자신에게 조차 이방인이 아닌가? 스스로를 진정으로 편안케 하는 자비를 베풀 줄도 모르는....... 그러니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가. 그래서 나는 오늘 이 불쌍한 나에게 자선을 베풀려 한다. ‘그래! 그를 만나 보아라. 네가 진정 원하는 의미와 맞닥뜨려보란 말이다. 기억하고 확인해보고 싶은 네 사랑의 정체를 가늠해 보아라.’

   한 때 주인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내 삶의 주인은 나이며 내 의지에 의해 모든 것이 바뀌고 희원이 이루어질 것이라 오만하게 고개를 쳐든 적도 있었다. 그런 때는 온몸에 꽃이 피고 황홀한 향기로 질식할 것 같았다. 내미는 손마다 욕망의 부산물이 쌓이고 미소를 지을 때마다 다른 미소가 거스름돈처럼 단박에 돌아왔다. 그런 때는 신이 나 운명, 삶의 목적 따위는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 법이다. 즐거워서 그런 걸 생각할 틈이 없기 때문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라면 그런 삶은 신에 반하는 것이고 하찮게 영혼을 좀 먹히는 낮은 삶이라 훈계할 것이다. 그래! 실컷 영혼을 좀 먹혀 보십시오. 사실 당신도 그런 다음에 신을 찾지 않으셨습니까?     

   그를 만날 것이다. 좀 어리게 보이려고 머리를 짧게 잘랐다. 결코 젊지 않은 얼굴에 열일곱의 머리를 재현한다고 그 사람이 나를 그때로 보아줄 것 같지는 않기에 지적으로 보이는 짧은 단발머리에 핀을 꽂았다. 어째서 과거의 일이 그렇게 생생한 것인가. 마치 어제처럼 아니 지금 일어날 것처럼 호흡 한 켜까지 피부를 찌르며 다가온다. 이럴 땐 인간의 시간에 살고 있는 기분이 안 든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하나로 응축되어 어느 것이 먼저 것인지 헛갈린다. 달의 나이에 핀 꽂은 단발머리를 하려고 어릴 적 바가지 머리를 했던 것인지, 바가지 머리를 재현하기 위해 핀 꽂은 단발머리를 한 것인지, 뭐가 앞인지 모르겠다. 그 사람이 날 보고 수줍게 웃을 것이다. 정말 촌 놈 같은 웃음이다. 웃음소리가 들린다. 어머니가 현관 앞에서 배가 고꾸라지도록 웃고 계신다. 그 사람이 자기 신발을 못 찾기 때문이다. 손가락 한 마디만큼 두꺼운 안경을 끼고도 그 사람은 우리 아버지 구두와 자기 구두를 구분하지 못했다. 바쁜 등교 길 다섯 명의 우리들이 얽히고설켜 신발을 찾는다. 그 사람은 자기 신발을 찾기 위해 우선 두툼한 책가방을 현관 옆에 툭 내려놓는다. 쪼그려 앉은 뒷모습이 작은 새 같다. 하나씩 검은 물체를 들어 올려 코앞에 바싹 같다 댄다. 보는 것이 아니라 입을 맞추는 듯 보인다. 어머니가 옆에서 키득대고 웃음을 참으신다. 나는 그 사람의 신발을 골라 주고 싶지만 나의 친절은 그를 곤란하게 할 것이다. 숨을 죽이고 그 사람의 의식과 하나가 되어 신발을 찾는다. 그가 나가면 나도 내 구두를 신고 학교로 향한다. 물론 어머니께 인사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머니는 나를 돌려세우고 마지막 확인 사살을 하신다.

   “얘, 어찌 인사 안 하누. 그럼 못쓴다. 근데 제는 어쩐다니, 눈구멍이 바늘구멍 만 한데 보이지도 않으니 저래서 어찌 큰 일 하니? 운전은 하겠니? 공부는 잘하는지 몰라도 세상 어찌 산다니.”

   “아버지 눈보다는 커!”

  표독스럽게 쏴 부친다.

  어처구니없어하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나도 학교에 간다.  

  그를 만나러 가려고 신발을 신었다. 그날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마 사월의 첫날이었을 것이다. 우산을 가져가지 않아 온몸이 흠뻑 비에 젖어 얼굴에서 물을 뚝뚝 떫기며 현관으로 들어섰다. 이미 내 마음은 뾰족해진 상태였다. 어머니가 화사한 홈웨어를 입고 웬 낯선 이와 웃고 계신다. 내게 뱅뱅 돌아가는 나팔꽃 같은 안경을 쓴 볼이 빨그스름한 그를 소개한다. 참 미웁게 생겼는데 그에게 이상한 향이 느껴진다. 비누 냄새 같기도 하고 절간의 사향 냄새 같기도 한....... 턱을 고추 세우고 뾰로통한 얼굴로 인사를 한다. 눈은 절대 맞추지 않고 곁눈질로만 쏘아보다가 쿵쿵거리며 방으로 들어간다. 느낌이 사랑이 되었다. 

   이제 삶에서 긴 시간 동안 아름다움을 즐기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내 상상력이 사라질 시간이다.     

               

               시간 바깥에 있던 것들을 

               시간 안으로 끌어들였으니 

               시간의 경이로운 술책에 의해 

               현실이 된 환상은 

               달빛처럼 녹아 없어질 것이다. 


하지만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한 번은 꼭 만나 보아야겠다.

달이 휘영청 밝다. 두 달 뜨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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