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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연 양윤희 Jul 13. 2023

인간이기에

오히려 더없이 인간이기에.......

성서에 [돌아온 탕아]라는 서사가 있다. 온갖 방탕한 생활 끝에 거지 꼴이 되어 돌아온 아들을 기쁘게 맞이하며 씻기고, 금가락지를 끼워주고, 화려한 집으로 들이는 아버지의 서사이다. 모든 일에 비뚤어짐이 없고 성실한 생활을 해 욌던 형은 그런 동생을 받아주는 아버지가 밉다. 방탕한 동생에게 벌을 내리지 않는 그 비대칭성에 울분이 치민다. 


늘 오차 없는 반듯한 삶을 살려고 노력해 온 나도 어릴 땐 성서의 이 담론을 읽으면 화가 났다. 언제나 형과 나를 동일시했으니까......   그러나 많은 삶의 단면들을 경험하고 구경한 나이가 되어 다시 이 서사를 생각해 보면 곁눈질로 아비와 동생의 포옹을 못 마땅하게 쳐다보는 형의 눈길이 오히려 인간적이지 않아 보인다. 갑갑하고, 작아 보인달까? 


균형, 대칭, 올바름, 정도, 정견, 이런 것들이 

불균형, 비대칭, 타락, 탈선, 삐뚤어진 견해보다

정말 더 나은 것일까?


어제 모 절에 불교이론을 공부하러 갔다가 그 절 최고 인기 명상 스님이 아이가 둘이나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승복을 벗고 환속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스님의 책이나 명상 강의를 들은 적이 있기에 적잖이 놀랐다. 강의를 하며 티 없이 활짝 웃던 스님의 얼굴이 떠오르며 나약한 인간의 disgrace----(나는 이 영어단어로 밖에 이 상황을 표현할 수가 없다)  어찌할 수 없는 운명적 슬픔에 마음이 공허했다. 최고의 엘리트 스님으로 추앙받게 되자 그는 얼마나 과거의 자신을 지우고 싶었을까......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시간이 원인과 결과로 촘촘히 이어져 있으면서도 결과가 원인을 부정하고 싶어 하는 상황이 도래한다는 것이......

불교에서는 연기론 즉 원인과 결과를 행위의 기본 모토로 삼고 있지만 이것도 생각해 볼 문제이다. 인간에게는 원인을 결과로 이끄는 메커니즘의 엄정함을 이해할 두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수준미달.....


 우리가 무언가를 돌이킬 때 잃는 것은 이전의 정체성이다. 우리는 같은 세계 안에 존재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시간이 진행되면서  "모든 질서로부터 편재된" "모든 세계의 바깥"에서 각기 자신의 응시로만 사물을 본다. 그것은 똑같지만 동일하지 않다. 그것은 "비동일" 하고 항상 "분산하고", "분산에 의해 자신을 모으는 것" 뒤돌아봄에 의해 야기된 다양성의 매력적인 표시이다. 우리는 뒤돌아봄에 의해 자유로워진다. 그것은 이전 세계와의 단절이 시작되는 지점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뒤돌아봄은 연기법 중 어디에 속할까..... 원인인가, 결과인가.....

우리 모두에게는 원인을 결과로 바꾸는 시간이라는 만화경을 통과하는 운명이 부여되어 있지만..... 그 만화경을 통과하며 물끄러미 자신의 뒤를 돌이킬 수 있는 자유로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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