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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영이 Nov 10. 2024

[아버지 나이가 지나서]

그리움과 사무침에

   “니도 고생 깨나 하기 생깃따”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아버지가 건넨 말이다. 부모님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평생을 살았다. 아버지는 오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하셨다. 유난히 골격이 좋아 마을에서는 꽤 잘 나가는 씨름 선수로 활약했다. 여러 대회에 나가 상품으로 송아지를 받아 올 정도였다.

   초등학교 무렵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도박장을 기웃거리는 인물로 기억된다. 그즈음의 농촌은 가을걷이가 끝나면 땔나무 하는 것과 가마니 짜기 외에는 일이 없다. 부지런한 사람은 멍석 만들기나 새끼 꼬기 정도다. 관공서에서 내건 문구가 마을 입구에  페인트로 씌어 세워져 다. ‘도박 없는 마을’, ‘미신 없는 마을’, ‘노는 땅 없는 마을’ 오죽했으면 랬을까?


    겨울철에는 유독 심했다. 며칠 동안 집에는 소식도 없다. 맏이인 나에게 어머니가 내린 과제는 아버지를 찾아오는 일이다.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나서야 했다. 동네를 벗어나 꼬불꼬불한 길을 한참 걷는다. 탐정처럼 평상시 이야기가 오르내리던 면 소재지 신작로 옆 주막집을 먼저 들른다. 집 안쪽을 기웃거리다 방문 밖으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당신의 목소리가 리는 지 확인하고 나면 무작정 또 발걸음을 옮긴다.


    그 어떤 심부름 보다도 하기 싫은 일이다. 노름판에 자리를 잡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도 싫고, 동무들과 어울려 놀지 못하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는 미움의 대상이었다.


    학교 졸업 후 도시로 나가 제조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작은 아버지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몸이 아파 부산 병원으로 모셨다는 것이다. 시골 군 소재지 의원에서 사흘을 지내다 병세가 악화되어 부산으로 왔단다. ‘괜찮아야 할 텐데···’ 초조한 마음을 안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복도 의자에 웅크리고 대기해 있는 아버지를 다. 얼굴은 초췌하지만 정신은 맑으셨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일그러진 모습으로 “짜슥아! 니도 고생깨나 하기 생깃따“. 무덤덤하고 얼떨떨하다. 병세가 나빠져 서둘러 인근 대학 병원으로 옮겼다. 가족이 간호할 겨를도 없이 결국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났다. 한창나이에 뭐가 그렇게 바쁜지 할아버지와 우리 가족을 남겨두고, 선산에 두 평 남짓 땅에 하나밖에 없는 영원한 집이 마련되었다.


    마흔을 넘긴 나이다. 복막염이 지체되어 결국 북망산을 찾아간 것이다. 지금은 그리 큰 병도 아닌 데!, 어머니와 오 남매 자식을 두고 훌쩍 우리 곁을  떠나셨다. 막내가 초등학교 입학하여 가방을 멘 지 몇 달 뒤다. 장남으로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동생들이 가엾을 뿐이었다.


    ‘사람이 안 하던 행동을 갑자기 하면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고 했던가.  일 년 여 시간을 아버지와 함께 논밭을 가꾸고 땔감을 집 마당에 쌓았다. 여태껏 보지 못한 일이다. 땔감 준비는 온전히 나와 남동생 둘의 몫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달라졌다. 이곳저곳 부초같이 다니는 일도 없이 집안일에 열심이셨다. 작은 나무 더미로 불안해하던 때와 달리 마당 한쪽에 높다랗게 땔감이 산더미를 이루었다. 마음이 저절로 풍요로워진다.


   학교를 졸업하고 시골에서 농사일을 돕다가 도시로  집을 떠난 지 몇 달 만에 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만남이 곧바로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마을에 처음 찾아오사람이오면 그냥 하룻밤을 재워준다. 남에게 싫은 소리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평판이 자자했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인데 너무 아깝다’는 말로 혀를 찬다. 하지만 가족들에게는 왜 그러셨을까. '개 버릇 남 못준다'라고 집안일을 팽개치고 반평생 어머니의 속을 끓인 위인이시다.


    어머니는 남편을 떠나보낸 후 아이들을 데리고 도시로 나왔다.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여섯 식구의 생계를 이끌었다. 자식 다섯의 뒷바라지를 해 준 덕분에 성장한 자녀들은 이제 다 살만하다. 야속하게도 고생한 세월만큼 어머니는 제대로 누려 보지도 못하고 몸이 쇠약해지셨다. 지금은 요양 병원에서 아버지 만날 날을 기다린다. 반백 년 만에 만나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


      어른이 되면서 혼자 중얼거린다. ‘아버지 나이가 되었네.’ ’ 아버지보다 십 년 더 살았네.‘ ’ 이제 이십 년 넘겼네’. 가장으로 가족의 행복을 채워 나간다. 그간 몸담았던 직장 생활을 마무리하였다. 아내와 전원의 아름다움을 맛보고 있다. ‘나무는 고요하려고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아니하고, 자식은 효도하려고 하나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했던가. 나 역시 부모가 되고 자식이 성장해 자녀를 두었다. 가정을 이뤄 멀리 떨어져 살고 있어 가끔씩 만나지만 사랑스럽다. 내리사랑이라고 하지만 부모의 사랑을 떠올려본다. 늦기 전에 후회 없이 부모님을 사랑하고 가족을 보듬는 생활을 이어가려 한다.


    아버지 또래의 동네 어르신을 뵈면 공연히 마음이 일렁인다. 살아 있다면 저 또래인데. 가족에게 울타리가 되지 않을지라도, 아버지가 옆에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오 남매의 모습을 어떻게 평가해 줄까. 내가 이룬 꿈을 본다면 무슨 말씀을 해 주실까? 스스로 위로한다. ‘니 참, 고생 마이 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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