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잠을 깨운다. 으스름 한 시간에 집을 나섰다. 다른 아이들보다 먼저 도착하기 위해 신발 짝이 맞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나뭇가지가 세차게 흔들리는 날은 모두가 한마음이다.
동네 입구 은행나무는 세월을 이겨내고 버틴다. 몸통 둘레는 어른 두세 아름이 더 되고 높이는 기와집보다 몇 곱절 위에 있다. 동네 입구에서도 은행나무의 기세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은 황금색 천지다. 이따금 떠내려온 낙엽은 물웅덩이에 쌓여 깊이를 분간하기 어렵다. 떨어진 은행잎은 한갓 쓰레기에 불과하였다. 우리들의 관심은 은행 열매 줍기에 있다. 열매를 줍는 일보다 껍질을 벗겨 내는 것이 고비다. 발에 밟혀 코를 찌를 듯한 냄새가 풍길 때면 마주하기 싫을 때도 가끔 있다. 이 또한 별일이 아닌 듯 은행 줍기는 계속이다. 은행은 한 그루에 달리는 열매가 상대적으로 많다. 쓰임새와 숫자에서 아이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밤나무 밑으로 아이들이 몰려든다. 마을 가까운 산비탈에 개울을 끼고 밤나무가 늘어서 있다. 밤 주인은 아람 줍는 것에는 간섭하지 않았다. 후-두둑 바람이 많이 불거나 기온이 뚝 떨어진 때가 횡재하는 날이다. 날씨가 좋지 않을수록 아람 줍는 몫도 많아진다. 먼저 줍는 사람이 주인이요 송이째 마주하는 것은 행운이다. 한 톨이라도 더 줍기 위해 밤송이를 헤집어 본다. 이파리에 뒤덮인 밤송이를 막대기로 뒤적거린다. 밤송이 가시에 손이 찔리는 건 예사다. 피를 보면서도 멈출 줄 모른다. 가끔은 물웅덩이에 옷소매를 걷고 손을 뻗는데 손이 시려 물 밖으로 재빨리 거둔다. 아침 해가 솟아오르면 밤 줍기는 끝난다. 양쪽 바지 주머니에 불룩하게 채운 날은 발걸음도 가볍다. 집에 들어설 때부터 가슴을 내미는 모양이 주머니에 담긴 양을 가늠하게 한다.
가을걷이는 어른들의 일이다. 벼 수확 철이면 아이들은 심부름꾼이요 웃음을 안기는 활력소다. 콩잎이나 들깻잎에 단풍이 들면 바빠진다. 자연이 안겨 주는 계절은 놀이의 대상이 아니라 먹을거리를 갈무리하는 계절로 다가왔다. 단풍잎을 모아 책갈피를 만들고, 글자를 새겨 이성에게 전하는 마음을 본다. 책갈피로 색색이 수놓는 풍경은 사랑을 쌓아 가는 듯하다.
아람은 이제 뒷전이다. 지난날 새벽잠을 깨우던 부지런함과 낟알 줍기는 단풍과 자리를 바꾸었다. 은행 열매는 약용으로 찾는 정도다. 도심에서는 천덕꾸러기 신세다. 은행나무 가로수는 길바닥으로 열매를 떨어뜨리기 전 들이대는 기계 진동에 뿌리째 몸부림을 친다. 어린 시절 알맹이 줍기와는 거리가 멀다. 밤톨은 그나마 제사상에 빠지지 않는 알곡일 뿐이다.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은행나무 화석은 2억 7천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은행나무는 적어도 페름기(2억 3천만 년~2억 7천만 년 전)에는 지구상에 나타났다는 이야기다. 지질학적인 대변동으로 지금의 은행나무 1종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멸종했다. 지금은 극동아시아에서 멸종을 면한 은행나무 1종만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제 은행나무는 세계자연보전연맹 멸종위기종 적색목록(IUCN 1998년 ver 2.3)에 멸종위기종(EN)으로 등재되어 있기도 하다.
불교에서는 은행나무를 성수(聖樹)로 여겼기 때문에 수천 년 동안 승려들이 절에 심고 가꾸었다. 한국에는 은행나무가 삼국시대에 불교와 함께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사찰 주변에 오래된 은행나무가 많은 것도 그런 이유다.
조선시대에는 공자(孔子, BC551~479)를 으뜸 성인으로 모시는 문묘와 향교에도 은행나무를 많이 심었다. 유학(儒學)의 시조(始祖) 공자가 아끼고 사랑한 나무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후 학문의 상징이 된 은행나무는 한국과 일본의 학교 교정에도 많이 심었다. 이제 도시 가로수로 심어지는 것을 꺼려하는 나무가 되었다. 그리 오래지 않은 동안에 상당히 많이 달라져서 전혀 다른 세상이 된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단풍 구경에 나선다. 오솔길에 수놓은 화살나무와 엄나무 이파리의 화려함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단풍의 수놓기는 순간이지만 우리네 가슴은 언제나 웃음을 머금고 추억을 새기며 산다. 동무들과의 한때를 좇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