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잃어버린 풍경의 행방
한 10여 년 전이었을까, O는 기억을 더듬었다. 찰랑대는 술잔처럼 웃음소리 가득한 이곳에서 O가 깊은 사색에 잠긴 이유는, 누군가 미끼처럼 던진 ‘고등학생 때’라는 말 때문이었다. 그 말 한마디에 O의 의식은 10년 전 기억의 웅덩이로 가라앉았고, 정신없이 헤엄치며 그때의 공간을 헤맸다.
어느새 교복으로 갈아입은 기억 속 O는, 시멘트 냄새 자욱한 새 건물들 사이 공터에 앉아 있었다. 투박한 돌멩이 사이로 잡초가 돋고, 그 잡초마저 담배꽁초에 갇혀버린,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공간. 당시 O는 담배 한 번 입에 물어본 적 없음에도 그 공간을 찾았다. 남몰래 소리를 질렀고, 쾌쾌한 공기를 폐부 깊이 들이마셨으며, 이유 모를 울분을 눈물로 쏟아내기도 했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고, 어떤 역할도 강요하지 않는 그곳에서 O는 비로소 온전한 개인이 되었다. O는 그저 멍하니, 도시의 민낯을 응시했다. 거대한 철제 담장이 세워지고, 육중한 철골이 뼈대처럼 솟아오르고, 시멘트가 마침내 살처럼 덧씌워지는 도시의 생장 과정을. 무언가가 끊임없이 소멸하고, 또 무언가가 쉴 틈 없이 생성되는 그 무심한 폭력성과 생명력을 동시에 목격했다.
- 무슨 생각해?
누군가의 목소리가 기억의 웅덩이에서 O를 건져 올렸다. O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지만, 사색은 멈추지 않았다. 10년 전 그 공터는 이제 지도 위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는 번듯한 오피스텔이 들어섰고, 누군가의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되었다.
- 다들 자기만 아는, 없어진 장소 같은 거 없어?
자신이 잃어버린 도시를 떠올린 O는, 문득 함께 있는 이들의 도시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O는 툭, 하고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을 신호탄으로, 저마다의 감춰진 도시의 풍경들이 하나둘씩 펼쳐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멀티플렉스가 된, 삐걱거리던 2층짜리 단관 극장. 퀴퀴한 팝콘 냄새와, 영화가 끝나도 불이 바로 켜지지 않아 여운을 곱씹을 수 있었던 그 암흑의 시간.
재개발로 사라진 낡은 상가 2층, 할머니가 끓여주던 3천 원짜리 칼국수 집. 김이 서린 창문과, 늘 덤으로 얹어주던 겉절이.
늘 그 자리에 있는, 변하지 않는 백화점의 기억도 있었다. 연말이면 화려하게 불을 밝히는 거대한 트리, 그 화려함에 압도되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
이야기가 흩어지고, 다시 술잔이 채워지는 짧은 침묵 속에서 O는 통유리 너머의 도시를 바라보았다. 익숙한 야경 위로, 조금 전까지 존재를 몰랐던 수많은 풍경이 투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반듯한 건물 앞에 채워지는 낡은 극장과 허름한 칼국수 집, 그리고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거대한 트리. 그리고 그 모든 기억의 지층 가장 아래에는, 10년 전 O의 눈물과 한숨을 말없이 받아주던 투박한 공터가 단단한 기초가 되어 빛나고 있었다.
도시는 기억을 지우지 않았다. 사라진 모든 풍경을 지층처럼 품은 채, 그 위로 새로운 시간을 묵묵히 쌓아 올릴 뿐이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각자의 기억이 겹겹이 쌓인 도시에서 서로의 어깨를 스치며 살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