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애프터 양>
하루가 일찍 끝난 이른 저녁, OTT나 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참이나 걸려 영화 한 편을 골랐건만, 1.5배속의 세상을 사는 제게 1배속은 신경을 거스르나 봅니다.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습관적으로 화면 오른쪽을 두 번 두드립니다. 조금이라도 전개가 늘어지거나, 대사가 없으면 쉽사리 견딜 수가 없습니다.
넷플릭스에는 1.5배속 버튼이 있고, 유튜브에는 요약 영상이 넘쳐나는 세상. 우리는 이야기를 감상하는 게 아니라, 정보를 섭취하듯 해치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삶에도 배속 조절 버튼, 10초 넘기기 버튼이 있다면 어떨까요? 지루한 출근길의 30분, 어색한 침묵의 3분,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1분을 모두 건너뛸 수 있다면 우리는 더 행복해질까요?
그래서 속도전에 조용히 제동을 거는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더욱 빨라진 미래를 다루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가장 느리고 원초적인 감각을 일깨우는, <애프터 양>입니다.
# 숲에는 1.5배속이 없다
영화 속 주인공 제이크는 차를 파는 사람입니다. 그는 안드로이드 로봇인 양에게 차의 맛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차를 마시는 건 단순히 맛있는 음료를 마시는 게 아니라, 그 찻잎이 자라난 흙과 날씨, 그리고 그곳에 머물렀던 시간을 함께 마시는 일이라고요.
제이크에게 중요한 건 결과물인 차 맛이 아니라, 찻잎이 숲에서 우리에게 오기까지의 과정과 시간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영화도, 우리 삶도 이처럼 과정을 바라봐야 하지는 않을까요? 찻잎이 싹을 틔우고 비바람을 견디는 것에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듯, 어떤 감정과 이야기들은 물리적인 시간을 온전히 견뎌내야만 비로소 우리 마음에 우러날 수 있겠죠. 그 시간을 배속으로 돌려버린다면 우리가 마실 수 있는 건 오직 정보뿐, 그 안에 담긴 숲은 사라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 당신이 건너뛴 10초 속에 숨겨진 것
코고나다 감독은 스크린 위에 이 차의 시간을 그대로 구현해 냅니다. 카메라는 인물의 대사보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그림자,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 인물 사이의 긴 침묵을 더 오래 응시합니다.
작은 스마트폰 화면으로, OTT 플랫폼으로 감상했다면 지루하다며 10초를 넘겨버렸을 그 정지된 시간들. 하지만 우리가 그 10초의 빈틈을 건너뛰지 않고 가만히 응시할 때, 그 여백은 지루함이 아닌 깊은 숨 쉴 틈으로 다가옵니다. 주인공의 떨리는 눈빛, 말하지 못한 감정들처럼 순간에 흩어지는 찰나의 아름다움은, 오직 제 속도를 지킨 사람에게만 보이는 법입니다.
# 이번 주말, 리모컨을 내려놓고
이번 주말에는 영화가 보고 싶다면 OTT 대신, 영화관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재생속도를 선택할 수도, 10초 뒤로 넘길 수도 없는. 스마트폰 알림도 당신을 방해하지 않는 어둡고, 몽환적인 공간. 그곳에서 차 한 잔을 우리듯 천천히, 영화가 흘러가는 속도에 당신의 호흡을 맡겨보세요.
모든 것이 빠르게 스쳐 가는 세상에서, 제 속도대로 천천히 흐르는 무언가를 그저 바라보는 일. 그것이야말로 스크린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휴식일지도 모릅니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애프터 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