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과 노예
인류 역사상 이토록 정보가 평등했던 적은 없습니다. 인터넷이 인공지능이라는 거대한 신경망으로 연결된 오늘날, 지식은 더 이상 계급을 가르는 잣대가 되지 못합니다. 모두가 같은 도서관에 앉아 있고, 모두가 인공지능이라는 같은 스승 앞에 서 있습니다. 하지만 이 완벽한 평등의 이면에는 그 어느 때보다 가혹한 '시점의 계급'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점은 우리를 귀족과 노예로 가릅니다.
자신의 시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알고리즘에 의해 다른. 누군가의 시점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귀족은 '본래구족', 즉 자신이 이미 온전한 존재임을 믿고 그 고유성을 단련하는 데 집중합니다. 노예는 '결핍'이라는 미신에 속아 평생 채워지지 않을 지식의 빈칸을 채우느라 허덕입니다. 한쪽은 나를 닦는 수양을 하고, 한쪽은 나를 채우는 노역을 하는 셈입니다.
이 계급을 나누는 결정적인 동력은 바로 에너지의 방향, 즉 도파민의 용도입니다. 귀족은 도파민을 생산의 용도로 사용합니다.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무언가를 생성하며 그 에너지를 삶의 두께로 '축적'합니다. 그러나 노예는 도파민을 알고리즘이 설계한 추천 피드에 던져버립니다. 타인의 기획에 반응하느라 아까운 에너지를 공허하게 '휘발'시키는 것이지요.
기술을 대하는 태도 또한 극명하게 갈립니다. 귀족은 인공지능을 자신의 가치를 황금으로 빚어내는 '연금술의 돌'로 부리지만, 노예는 기계의 속도에 전전긍긍하며 스스로를 도구화합니다. 이 차이는 행동의 원리에서 정점을 찍습니다. 귀족은 질문하며 주권을 행사합니다. 노예는 짜여진 판 위에서 그저 '반응(Reaction)'할 뿐입니다. 같은 시간을 써도 한쪽은 놀이를 하고, 한쪽은 숙제를 하는 격입니다.
마지막으로 관계 맺는 태도를 보겠습니다. 귀족은 '상즉상입'의 마음으로 타인의 빛을 빌려 자신의 세계를 확장합니다. 노예는 비교와 시기의 마음으로 타인의 빛을 시샘하며 자신의 영혼을 소모합니다.
일상의 편리함을 줄여서 귀족의 주권을 행사하는 것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예를 들어 유튜브 시크릿모드로 추천 영상을 끄고 자동재생 대신 직접 검색어를 입력해 보면 검색하는 불편함 수준의 실제로 나에게 필요한 영상이 생각보다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러한 불편함이야말로 우리가 주권자임을 증명하는 셈입니다. 우리의 시점이 맑아지는 순간, 세상의 모든 정보는 비로소 각자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각자의 황금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