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제의 무녀 사야 #3 비로사율

살아야할 이유

해가 저무는 황산

피비린내는 바람을 타고 비로사율의 코끝에 밀려왔다.

붉은 노을은 방치된 주검에 노을을 덮어주며 장송의 예를 올리고 있었다.

마로비(기마대) 별장 비로사율은 말에서 내렸다.


묵직한 투구를 벗고 피와 섞인 땀을 닦아내다 조룡대 쪽을 보았다.

아직도 사야의 바람이 느껴졌다.


“사야…”

그 이름 하나가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 퍼졌다.

살육의 들판이 아니라, 향내처럼 은은히 떠오른 기억.

조룡대 제례에서 처음 마주친 그날의 사야.


무녀 사야를 사비에서는 이렇게 불렀다.

바람의 무녀 사야, 봉황의 무녀 사야 혹은 페제의 무녀 사야라고.


어느 날이었던가...

조룡대 봉황의 제단 위, 연기 속에서 사야는 바람의 신을 부르고 있었다.

사야는 기도하는 가운데 뭔가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문득 얼굴을 돌렸을 때 비로사율과 눈이 마주쳤다.


멍하니 그녀만 쳐다보고 있는 비로사율은 넋을 잃은 것 같았다.

'뭐야 저 바보는...'

사야는 자신도 모르게 풉 하고 웃어버렸다.

그날 우직한 비로사율은 맹세했다.

끝까지 이 여인을 지키겠노라고.


비로사율은 그 이후로 항상 자청해서 그녀의 곁에 있었다.

다른 무장들에게는 경건한 의례 중 부동자세로 서 있는 것이 고역이었다.

비로사율에게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시간이야 말로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제례 때의 호위, 의례 때의 선두, 사야가 웃을 때, 주술로 탈진했을 때—

그는 그 모든 순간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사야는 그가 싫지는 않았지만 표현할 수 없었다.

국무로서의 책임, 그리고 주변의 시선이 그녀를 묶고 있었기에.

그러나 그녀는 넋을 잃고 쳐다보는 그 때문에 종종 소리 없이 웃었다.

그의 시선이 오래 머물 때마다 엄히 나무라곤 했다.

“사율, 무엄하구나.”


그러던 어느 날 제례가 끝난 뒤 사야는 혼자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하늘엔 연기와 별빛이 겹쳐 떠 있었다.

비로사율은 말없이 서 있는 시간조차, 그녀의 존재로 채워져 있었다.

제단 위의 사야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사율, 불경하다.”

꾸지람 같았지만, 말투는 부드러웠다.


그녀는 연기의 흐름이 가라앉은 뒤, 천천히 제단을 내려왔다.

“오늘 바람이… 조금 어지러웠어..”

무슨 소리인지 몰라 비로사율은 목을 긁적였다.


“기류가 흔들린 건, 그대의 호위가 약했기 때문이야”

바보 같은 비율사율에게 툭 내밷고는 그녀는 얼굴이 붉어져서 고개를 돌렸다.


또 어느 밤은 무리한 사야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었다.

무녀들이 돌보는 가운데 그녀는 바람처럼 가는 숨결을 내쉬며 잠들었다.


그날 밤, 비로사율은 아무도 모르게 그녀를 지켰다.

무거운 투구를 벗고 조용히 마루에 앉았다.

땅바닥에 검을 곧게 세운 채 밤을 지새웠다.

문 안의 기척이 조금이라도 흔들릴 때면 그는 숨을 죽였고,

침묵은 기도처럼 그 마루에 남았다.


아침, 그녀는 조용히 일어나 문을 열었다.

바깥의 기척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하지만 그 자리에 남겨진 투구 하나가 밤의 존재를 말해주고 있었다.


다음 날 제례를 마친 뒤,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호위는… 마음만으로도 충분하답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마치 칼날에 가슴이 베이는 듯 쓰라렸다.


잠시 회상에 잠겼던 비로사율은 다시 눈을 뜨고 황산을 내려다보았다.

비록 오늘 황산 전장에서 승리했지만, 그의 마음은 무거웠다.

그녀의 주술을 타고 전장에 바람으로 휘몰아칠 때

그는 누구보다 먼저 사야의 감정이 느껴졌다.

케이린과 페제의 생명에 대한 연민...


그녀의 바람은 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주술 전쟁의 살육이 그녀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었다.


멀리 붉게 물든 하늘 너머,

조룡대의 제단 위에 사야가 기도하고 있을 테지...


살아서 다시 그녀를 볼 수 있을까...

그의 얼굴을 스치는 바람.

그것은 사야의 기도 같기도 하고 그리움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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