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내는 시간이 필요한 때>
호주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지 정확히 한 달이 되었다.
한국에서의 한 달 동안 삶은 정말 순식간에 흘러갔다.
우린 아직 집도 일자리도 구하지 못했다. 우리 부부는 친정부모님 집에 얹혀살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호주의 여유로움과 호주에서 더 있지 못한 아쉬움을 추억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호주에서 와인과 파스타 고기 등 안 좋은 음식을 너무 많이 먹은 지라...
사실 이십 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안 좋은 음식들을 내 몸에 차곡차곡 쌓아 오고 있었다.
피부는 정말 망가진 상태, 몸도 안 좋은 상태,
그래서 우리는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했다.
무슨 적기냐고?
단식하기 좋은 적기다!
어느 때보다 스트레스 지수가 없다. 단식을 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이다.
내가 단식을 처음 시작한 때는 정확히 10년 전...
사실, 건강하지 않은 방식으로 단식을 해왔던 것은 중학교 때부터였다. 나는 무용전공자였다. 숙명적으로 체중을 조절해야만 했고, 입시철을 앞두고서는 더 혹독하게 다이어트를 했다.
아침 점심만 먹고, 저녁은 일절 먹지 않았다. 그 당시 내 키는 164cm 었는데, 몸무게는 47kg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생리를 시작했는데 체지방량이 너무 없어서 중2부터 생리가 멈췄다.
그때는 건강에 대한 지식도 부족했고, 그저 말라야 하는 게 무용할 때의 기본 조건이라고 여겼다.
어린 시절부터 혹독하게 다이어트를 했던 탓인지 식탐은 갈수록 늘어만 갔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폭식하는 습관이 생겼다. 먹지 않으니 변비가 생겼고, 장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중3 때는 결국, 호르몬 주사를 맞아야만 했다. 그래도 생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예술고등학교에 합격해서 본격적으로 무용과 학생이 되었다.
중학교때와는 다르게 고등학교 때는 학교 안에 매점이 있었다.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과 군것질을 했고, 급식실에서 제일 늦게 나오는 학생이 되었다. 왜냐하면 매일 세 번 리필을 해서 먹었기 때문이었다.
체육시간 때는 몰래 담을 너머 떡볶이를 사 먹으러 갔다. 아무리 무용을 많이 한다 해도 식탐이 늘다 보니 살은 자연스럽게 찔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들은 입시 때 보던 학생들이 고등학교 1학년이 되자 너무도 토실토실한 모습을 보고 불호령을 내렸다.
"당장 살 빼! 복도에 너희 몸무게 다 붙여놀 거야. 알겠어?"
복도에 내 몸무게가 떡하니 적혀있었다.
키 165cm 51kg... 수치스러웠다.
지금 생각하면 참 통통한 몸이 아니었는데, 그때는 왜 그렇게도 내 몸이 싫었는지...
친구들 사이에서는 너도나도 다이어트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콩쿠르를 앞두고 한 학년 윗 선배는 1일 1식만 해서 43kg까지 되었다고 했다. 우리는 복도를 지나가면서 그 선배를 볼 때마다 부러움의 시선으로 그 선배를 동경했다.
"나도 진짜 저렇게 되고 싶다..."
그때까지만 해도 간헐적 단식, 1일 1식 이런 지식보다는 그냥 굶는 게 만사최고라고 생각하던 시기였다.
우리는 그 선배처럼 되기 위해, 저녁을 먹지 말자고 약속을 했지만, 그 약속은 하루도 채 가지 않았다.
겨우 열일곱 살 여자아이들은 함께 몰려다니면서 떡볶이를 먹고, 아침에 만나 빵집에서 따끈한 빵을 사 먹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으니까...
실기 시험을 앞두고는 나름 살을 빼려고, 더 많은 운동과 무용을 했다. 학교에 등교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버스로 1시간이었는데, 나는 식욕을 이기지 못해서, 그 거리를 롤러브레이드를 타고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엄청난 열정이었다.
어느 순간, 아이들 사이에서 먹토가 유행처럼 번졌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는데, 그 시기 때는 살 빼는 것이 너무도 중요해서 나도 친구들을 따라 먹토를 했다. 실컷 먹고 토하고...
몸 건강은 갈수록 나빠져만 갔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무용을 하는데, 골반쪽이 너무 아파서 무용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병원에 가서 MRI를 찍으니 이대로 가면 성인이 돼서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열여덟 살 때, 무용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전학을 갈 수는 없었다. 최대한 무용 수업은 참관하는 것으로 하고, 고3이 되었을 때는 무용 실기 수업에 완전히 빠지는 것으로 선생님과 합의를 봤다.
대학이 걸린 문제니, 친구들은 이제 다이어트를 죽기 살기로 했다. 방학이 되면 단식원에 들어갔다 온 친구도 있었다. 한 달 사이에 10kg가 빠져 있었다. 그때 당시에 내가 보기에는 통통했던 친구가 이제 무용수로 돌아온 것이었다.
나는 무용을 하지 않으니, 친구들과 다르게 점점 살이 붙어만 갔다.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그동안 다이어트한다고 못 먹었던 음식들을 보상이라도 받듯 하염없이 먹었다.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풀었다. 이제 토하는 것은 하지 않기로 했다. 목이 너무 아팠으니까.
내 인생 최고 몸무게 55kg가 되었다. 그 해에 생리를 다시 시작했다. 그토록 호르몬 주사를 맞았을 때는 생리가 나오지 않던 것이 살이 찌니 생리를 시작했다.
친구들은 인 서울 대학을 갔고, 나만 우리 학급에서 대학을 가지 못했다. 엄마는 졸업식날 펑펑 울었다. 내가 무용을 하는 것을 찬성했던 이유가 무용을 하면 인 서울 대학을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데, 나는 재수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무대를 잊지 못해서, 그나마 비슷한 전공이 연극영화과인 것 같아서, 연극영화과로 가기로 정했다. 57kg가 되어서, 살을 빼야만 했다. 연극영화과에서도 마른 몸을 좋아했다. 마르지 않으면 선택받을 수 없는 세상에 태어난 것이었다.
별별 다이어트를 다 해봤다. 바나나다이어트, 사과다이어트, 원푸드 다이어트, GM다이어트, 마녀수프다이어트, 그리고 마지막으로 레몬디톡스 다이어트. 그게 내 정점이었다.
어느 날, 복통이 너무 심해져 왔고, 변을 보는데 피가 너무 나왔다. 처음에는 생리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내 나이 스무 살 때 나는 처음으로 대장 내시경을 받았다. 궤양성 대장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유전적 요인도 아니었다. 환경적 요인이었다. 스트레스와 이상한 다이어트를 그렇게 하다 보니 내 몸이 면역력이 약해지면서 내 몸 스스로를 공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의사가 처방해 주는 스테로이드 약을 먹었다. 어느 순간, 몸이 붓고 점점 몸이 망가지는 것을 느꼈다. 몇 달 동안 먹던 스테로이드를 끊었을 때는 내 뼈와 몸이 완전히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변해버렸다.
내가 스스로 건강하게 다이어트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때가 스물두 살 때였다. 다이어트 단식이 아닌, 건강하게 내 몸을 다시 예전처럼 회복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서점에 가서 건강에 대한 책을 찾아보면서 단식 책을 접하게 되었다. 이게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단식 책을 여러 권 읽고, 인터넷 후기를 찾아보았다. 그렇게 스물두 살 때, 처음으로 생수 단식 7일을 했다.
단식을 하기 전 감식기를 거쳤고, 구충제를 먹었고, 마그밀까지 먹었다. 너무도 힘들었지만, 그 해에 궤양성 대장염은 재발하지 않았다. 꽤 오랜 시간 대장염이 오지 않아서 나는 단식의 효과를 봤다고 믿었다.
그리고 1년 후 한 번의 생수 단식 7일을 하였다. 처음 했을 때보다 더 힘들었다. 그런데 피부부터 몸이 정화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스물네 살 때 영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후 내 몸은 완전히 다시 망가졌다. 1년간 술을 매일 같이 마시고, 무절제할 정도로 음식을 탐했다. 1년 만에 15kg가 쪘다.
피부 질환이 생겼고, 편평 사마귀가 발생했다. 한국에 와서 다시 살은 뺐지만 이 사마귀는 얼굴에서 사라지지가 않았다. 레이저를 몇 차례 시도했지만, 그래도 호전되지 않았다.
그 후로 나는 장기 단식엔 매번 실패했다. 그래서 간헐적 단식으로 돌렸고, 1일 1식을 번갈아 가면서 몇 년을 했다. 몸무게는 53-54kg를 왔다 갔다 했다. 하지만 살은 빠졌어도 여전히 몸은 건강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자극적인 음식, 술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서른이 되었을 때, 주사피부염이라는 알 수 없는 피부질환이 생겼다. 이것 또한, 의사가 스테로이드 피북과 약을 잘못 처방한 문제 때문이었다. 결국, 난 피부과에서 레이저를 받고 몇백만 원의 치료를 받았지만 호전되지 않았다.
문제는 한국에서 시작되었던 궤양성 대장염이 호주에 온 이후로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여태껏 살면서 가장 길게 궤양성 대장염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었다.
호주에 오기 전 혹시 몰라서 대장 내시경을 하고 왔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지금 내가 염증이 심한 상태라고 하셨고, 조직검사까지 해보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결과를 듣지 못하고, 호주로 올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많은 약을 처방받아 왔지만, 여전히 궤양성 대장염은 낫지 않았다.
나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장기 단식에 돌입해야만 했다. 예전에 의사 선생님과도 단식에 관한 문제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피가 나지 않으면, 내 몸의 컨디션에 따라서 해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나는 스물한 살 때 궤양성 대장염과 잠시 작별했다.
다섯 살 동안 나를 괴롭혔던 궤양성 대장염이 이제는 더 이상 피는 나오지 않는다. 지금이 적기다. 단식을 해서 염증 수치를 낮춰야만 한다.
더 이상 미루지 말고, 맞닥뜨려야 한다.
내 몸의 컨디션이 좋으면 일주일, 이주일, 삼주까지 가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