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는 KPI 달성에 성공했을까?
얼마 전 Q와 이런 대화를 했다. 우리 KPI가 뭐였더라? 글쎄. 그런 것도 정했어? 했지, 했잖아. 그러고 보니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기도 하네. 점점 기억이 짧아져서 말이야. 그제야 회사에서 쓰는 단어를 가져다 KPI 라며 우스갯소리로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Q의 목표는 틀에서 벗어나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했고, Y는 직접 공간을 만들고, 브랜딩 하고, 무언가 팔아보는 것이라고 했다. 나에게도 무언가 목표가 필요했다. 어쩌다 보니 흘러갔지만, 그럼에도 의미를 찾고, 납득할 수 있는 결과를 만들고, 누군가에게 입증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회사에서도 삶에서도 그런 사람이니까. 그래서 하나 골랐다.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에 적응하는 것.
가게를 여는데 낯선 사람을 만나는 데는 당연히 적응되겠지, 하겠지만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레비에 들어오는 손님을 향해 반사적으로 웃는 얼굴로 서있는 것과 열린 마음으로 맞이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 심지어 레비는 친구의 집에 놀러 가듯 편안한 곳을 추구하지 않았던가. 레비 멤버 중에 가장 외향인의 얼굴을 하고 많은 친구를 만나는 사람치고는 어울리지 않는 고민으로 보이겠지만, 나에게는 꽤 오래된 숙제였다.
나는 원체 겁이 많은 사람이다. 무언가 잘못해서 혼을 낼라치면 시작도 하기 전에 눈물부터 쏟아서 뭐라 말도 못 했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엄마의 단골 에피소드였다. 다만 안 그런 척을 적절히 할 수 있는 어엿한 사회인이 된 것뿐이다. 친구들이 있는 자리에서 새로운 사람과 환경을 마주한다면 나는 좀 더 쉽게 용기를 냈고, 회사에서는 나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감으로 버텼다. 하지만 온전히 혼자가 됐을 때, 나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굴었다.
그런 성향이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아무래도 여행이었다. 나는 '혼자' 출발을 해도 결국 누군가와 함께하는 여행만을 해봤다. 친구 집에 머물거나 함께 여행하는 사람이 합류하는 식이다. 여행지에서 혼자의 시간이 생기면 익숙한 행동을 했다. 카페에 가서 책을 읽고 그림을 그렸다. 사람들과 대화보다는 관찰하기를 선택했다. 검색이나 블로그를 찾아 확인된 것만을 경험했다. 그러니 문제였다. 레비는 확인된 사람만 오는 공간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누군지 모르는 낯선 손님이 많아지는 걸 바라는 공간이었다.
나는 레비는 익숙한 동네와 골목이라는 사실을 되새기려 노력했다. 그 안에 의무감과 책임을 덧붙여 낯선 이를 마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나를 밀어 넣었다. 어쩌겠는가. 문을 열어버렸는데. 레비에서 나는 반강제적으로 낯선 사람, 낯선 일, 낯선 것을 경험했다. 그 사이에 내가 조금 더 사회적이고 외향적이고, 열린 사람이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리고 1년 하고도 4개월이 지났다. Q는 레비가 삶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고, 꼭 잡고 있던 많은 것들을 놓아버리게 도와주었다고 말한다. 그 이야기를 할 때마다 눈동자에 생기가 느껴지는 것을 보니, 말하는 것보다 마음에서 느껴지는 게 훨씬 클 것이라고 나는 넘겨짚게 된다. Y는 언제나처럼 느긋한 표정으로 내가 하고 싶던 공간을 만드는 걸 했으니까.라고 말했다. 다들 나름의 지점에 도달한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마음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 열린 마음으로 손님들을 맞이하고 익숙해져서, 이제는 여행에서 낯선 이들과 함께하는 경험을 즐기게 되었다.라고 떠들 수 있으면 좋겠지만, 나는 여전하다. 바뀐 게 없다. 혼자서 여행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혼자 낯선 사람들과 말하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 낯선 사람이 레비에 올 때마다 손님이 와서 신기한 마음 반, 긴장하는 마음 반인 것도 여전하다. 그렇게 해선 어떻게 레비를 운영하냐 하면, 그러게. 이게 또 어떻게든 흘러가더라.
어느 날은 지켜본 지 1년이 넘었는데 궁금해서 겨우 용기를 냈다는 손님이 찾아왔다. 우리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며 먼저 말을 걸어주셨고, 어떤 날은 혼자서, 어떤 날은 친구들을 데리고 다시 찾아왔다. 가끔은 손에 제철 과일을 들고 오기도 했고, 날이 추울 땐 동네의 붕어빵 맛집에 들렀다며 일부러 건네주고 가는 손님도 있었다.경계심은 자연스럽게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긴장감은 여전했다. 워크인으로 찾아온 무뚝뚝한 표정의 손님이 오면 숨어버리기도 했다. Q는 사회성 있는 척! 하는 일에는 자신 있다며 앞으로 나서주었다. 아직 어떤 와인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에 추천이 어려워 다급하게 전화를 걸면 Y가 냉큼 추천리스트를 정리해서 보내주었다. 내 마음이 힘들어 도저히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을 때는 둘 다 편하게 도망가라고 말해주었다. 그렇게 레비에서 있는 것에 익숙해졌다. 여전히 낯선 이들을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고서.
많은 사람들이 부지런히 스스로를 바꾸려고 한다. 세상을 살면서 생기는 괴로움의 이유를 스스로에게 찾다 보니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나 또한 그랬다.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이상화하고 기대했다. 현실은 상상 밖의 일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못했다. Q의 표현을 빌리면 꽉 잡고 놓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레비를 통해서 어떤 인간이 되고 싶다고 했는데, 레비는 오히려 그냥 그대로 있어도 된다고, J는 달라지지 않고 여전히 서툴게 있어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나의 KPI 달성에 실패했다. 정확히는 KPI 설정에 실패했다. 나는 나를 바꾸지 않아도 괜찮다. 레비에서의 시간은 내게 그런 삶도 있다고 알게되는 경험이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레비를 바라보며, 이번에는 조금 다른 KPI를 세워볼 생각이다. 그게 무엇이 될지는 아직 모른다. 아주 천천히 고민해봐야지. 느리지만, 멈추지않는 레비에 어울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