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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추 Jul 07. 2023

군대가 낳은 괴물 ‘하이드’

기억 속 이야기 12

나는 방위병으로 군복무를 했다. 1994년 5월 2일에 소집(방위병은 입대/제대가 아니라 소집/소집해제라고 했다)되어 18개월간 복무했는데, 방위병 신규배치가 그해 12월까지만 이루어졌다고 하니 거의 ‘마지막 방위’(1997년 제작된 영화 제목)인 셈이다. 당시 현역 입영대상자들이 넘쳐났기 때문에 눈이 나쁘다거나 하는 사소한 이유만으로도 방위병 복무 대상이 되었다.


50대 이상이라면 들어본 사람이 있을 법한 ‘송추방위’(양주군 송추계곡 주변에 있던 부대로 현역병과 동일한 일과시간을 보냈다)였는데, 훈련기간이 아니라면 오후 6시에 퇴근했으니까 영내에서 24시간 생활하는 현역병들에 비하면 편하게 군 생활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방위병으로 복무해서 부끄럽게 생각한 적도 없고 전투방위였다고 내세우고 싶은 마음도 없다.


나의 군대에 대한 생각은 한 마디로 ‘가능하면 안 가는 게 좋은 곳’이다. 내게 딸만 둘이어서 가장 좋은 점이 뭐냐고 묻는다면, 애들 군대 안 보내도 되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평생을 군에 몸담은 분들이나 군복무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분들이 듣는다면 방위 출신이 지껄이는 헛소리라고 하겠지만, 개인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으니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지금은 없어졌다고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군대에는 얼차려, 구타, 따돌림 등이 존재했다. 그 무엇보다 군대는 개별성과 창의성이 무시되고 집단의 논리와 통일성이 강조되는 사회임에 틀림없다. 90년대 육군 현역병의 경우 26개월을 꼼짝없이 병영 내에 갇혀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2년이 넘는 기간을 사회와 격리된 채 지낸다는 것 자체가 젊은이들에게는 득보다 실이 많았다.


태안의 해안경비 부대에서 현역병으로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선배가 있었다. 내가 1학년 때까지 같이 학교생활을 했으니까, 그 선배는 아마도 3학년을 마치고 입대했다가 1996년에 복학했을 것이다. 나도 1996년에 복학해서 학교생활을 했고 과내동아리도 같아서 함께한 시간이 많았다. 그는 선배들에게 깍듯하고 후배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는 젠틀하고 온화한 성격이었다.


선후배들이 그가 달라졌다는 걸 느낀 것은 몇 번의 동아리모임 뒤풀이 술자리가 있고 나서였다. 입대하기 전에는 술을 마셔도 크게 취하지 않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던 그가 술에 취해서 주사를 하고 후배들에게 막말을 했던 것이다. 그의 선배들 입장에서 본다면 귀여운 술주정이었고, 평소에 구사하는 언어와는 180도 다른 그의 막말로 술자리가 재미있어지기도 했다.


그런 일이 몇 번 있은 후 선배들은 그에게 ‘하이드’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인간의 이중성을 다룬 작품으로 유명한 <지킬 박사와 하이드> 속 주인공처럼, 평소에는 바르고 이성적인 그가 술에 취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데서 착안한 것이었다. 문제는 그 빈도가 점점 잦아져 술만 마셨다 하면 '하이드'가 되었다는 것이고, 도대체 언제부터 ‘하이드’인지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배들은 술자리에서 그가 변할 조짐이 보이면 ‘너 지금 하이드지?’라고 물었고 그때마다 그는 ‘하이드’ 임을 부정했지만 우리는 그 대답을 믿지 않았다.


나는 그가 ‘하이드’가 된 원인이 군대에 있다고 믿는다. 군대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스트레스를 풀 곳은 없었고, 26개월의 공백은 빠르게 변한 현실에 뒤처졌다는 불안함을 불러일으켰고, 신세대 후배들은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낯선 존재로 비쳤을 것이다. 군대는 그에게서 평정심과 문학적 감수성을 빼앗고, 그의 내면에 아주 조그맣게 잠자고 있던 ‘하이드’를 깨웠다.


입대 전 그가 얼마나 문학적이고 재기 발랄했는지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그가 1학년일 때 한 해 선배와 도서관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하늘에 있는 뭉게구름을 보고 “형, 구름이 좆나게 많네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선배는 “야, 너는 글을 쓴다는 놈이 좆나게가 뭐냐. 구름이 양떼같이 많다, 뭐 이런 좋은 표현도 있는데.”라고 타박을 주었다. 그러고는 도서관 내 식당에서 같이 라면을 먹었는데, 라면을 맛있게 먹던 그가 선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형, 라면이 양떼같이 맛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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