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자 동기들보다 대학을 일찍 졸업했다. 1994년에 5월에 방위병으로 입대하면서 3학년 1학기까지 다닌 것으로 인정받았고, 1996년에 복학하여 남은 3학기를 마치고 1997년 8월에 가을학기 졸업을 했다. 현역병이었던 남자 동기들보다 1년 반은 빨리 졸업을 한 셈이다. 그렇게 여름방학과 동시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덜컥 졸업을 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해 우리가 IMF 사태로 알고 있는 외환 위기가 발생했다.
사실 내가 졸업하기 전까지만 해도 문창과는 졸업을 앞두고 딱히 취업 준비를 하지는 않았다. 대부분 선배들이 운영하는 출판사나 편집기획사에 알음알음으로 취업하고 몇몇은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1997년은 보험사와 영업직 외에는 신입사원을 채용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었을 만큼 어려운 시기였으니, 출판사나 편집기획사 선배들에게서도 취업과 관련한 연락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이미 졸업했으나 취업을 하지 못한 89학번 남자 선배들 몇 명이 일반기업 공채를 준비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타과라면 특별한 일이 아니겠지만 문창과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시 신입사원 공채에 지원하려면 토익(TOEIC) 같은 영어 공인인증시험 성적을 제출하도록 되어 있었다. 나도 서울에 올라간들 뾰족한 수가 나는 것도 아니고 안성을 떠나기도 싫었던 차에, 공채를 준비하는 89학번 선배 한 명과 함께 자취방에서 학교 도서관을 오가며 토익 공부에 돌입했다.
대학에 입학한 후로 1학년 때 교양영어 책을 들여다본 것을 제외하고는 영어와 담쌓고 지낸 데다, 학원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독학으로 토익 시험을 준비했으니 ‘무식이 용감이다’는 말이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 다행히 방학 중에도 학교 식당을 운영해서 점심은 학교에서 먹고 저녁은 자취방에서 라면을 끓여 먹으며 토익 공부를 했고, 한 달쯤 지났을 무렵 서울에 올라가 첫 토익 시험을 봤다. 그렇게 해서 받은 나의 첫 토익 점수는 650점 정도였다.
하지만 첫 번째 토익 점수보다 더 기억에 남는 것은 에버랜드 방문이다. 나와 선배는 첫 번째 토익 시험을 본 다음날, 용인에 있는 에버랜드에 놀러 가기로 정해놓았던 것이다. 하루도 빼먹지 않고 공부한 우리들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대학생도 아니고 사회인도 아닌 취업준비생이라는 신분의 불안정함, 처음 경험한 토익의 높은 벽에 대한 절망감 등으로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쨌든 우리는 오랜만의 나들이 기분을 내려고 애쓰며 이것저것 놀이기구도 타고 맛있는 것도 사 먹었을 것이다.
나들이 다음날부터 우리는 심기일전하여 다시 토익을 파고들었고, 나는 8월 24일 두 번째 토익 시험에서 730점을 받는 쾌거를 이루었다(커버이미지. 자랑스러운 성적표를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대학 재학시절 꾸준히 영어공부를 했거나 학원을 다니며 토익을 준비한 사람들에게는 보잘것없는 성적이겠지만, 단 두 달간 독학으로 공부하여 얻은 점수치고는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문제는 또 거기에서 멈추었다는 것이지만.
공부한다는 핑계로 계속 안성에 머무를 수는 없었기에 자취방을 정리해 서울로 올라갔고, 채용 공고가 난 몇 군데 회사에 입사원서를 제출했다. 1세대 벤처기업인 핸디소프트와 농협중앙회 두 군데의 서류전형에 합격했는데 두 군데 모두 면접 또는 2차 시험에서 탈락했다. 이후 공채를 포기하고 중고생을 대상으로 하는 학원에서 영어강사가 되었다(물론 나는 문창과 출신임을 내세워 국어강사를 지원했는데 원장이 중고생 영어는 어렵지 않으니 영어강사를 해보라고 했다. 하지만 중학교 영어도 어려워서 다른 강사가 출제한 시험문제 답을 틀리곤 했다).
이후로도 한두 해 동안 동기가 운영하는 학원에서 영어를, 선배가 강사로 있던 학원에서 국어를 가르치며 학원 강사 생활을 했고, 잠깐 시골에 공동체생활을 하러 내려가기도 했다. 그러다가 2001년에 선배 소개로 편집회사에 취직하면서 그나마 전공을 살린 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회사를 1년 반쯤 다니다 그만두고 2003학년도 수능시험을 준비했다. 한약학과를 목표로 3개월 정도 준비했는데, 시험 끝나고 나서 허리디스크로 병원에 다녔을 만큼 잠도 안 자고 공부했지만 합격할 만한 성적은 받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무슨 일이든 오래 하지 못했던 것 같다. 편집회사에서 제일 오래 일하기는 했지만 그쪽에서도 회사를 자주 옮겨 다녔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를 즐기는 성격은 아닌데, 한 회사에서 유사한 노동을 반복해야 하는 시스템을 견디지 못했던 것 같다. 최근 새로운 노동 트렌드로 ‘긱 경제(Gig Economy)’나 ‘긱 워커(Gig Worker)’라는 말이 쓰이고 있는데, 나는 아무래도 시대를 앞선 긱 워커가 아니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