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 이야기 15
B후배는 시인이고, 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름을 알 만한 작가이다. 솔직히 말하면 졸업 이후 문단에 관심이 없어서 전혀 몰랐는데, 2000년대 후반 한국 시단에 ‘미래파’(권혁웅 평론가가 2005년 첫 시집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은 세 명의 시인을 언급하면서 처음 사용한 말이라고 함) 논쟁을 불러일으킨 작가들 중 한 명이다. 동시에 그녀는 대형 출판사 내의 임프린트 조직에서 시작한 출판사의 대표이기도 하다. 유명 작가들의 에세이와 소설 등 베스트셀러를 많이 펴낸 듯하다.
학창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면, 일단 그녀는 외모가 화려했다. 문창과 여학생들은 문학을 사랑하느라 자신의 외모는 가꾸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녀는 얼굴도 예쁜 데다 화장도 하고 옷도 잘 입고 다녔다. 그래서 문창과 여학생처럼 안 보였고 선뜻 다가서기도 어려워 보였다. 그런데 실제로 그녀의 행동이나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털털한 구석이 많았다. 선배들도 잘 따랐고 술도 잘 마시고 고스톱 치는 것도 좋아해서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또 그녀는 학과소식지 ‘진흙과 통나무’ 편집부의 일원이었다. 나에게 편집장을 맡긴 선배가 편집부는 2학년 중에서 외모 순으로 두 명을 뽑고, 1학년 중에서 똘똘한 순으로 한 명을 뽑았다고 우스갯소리로 얘기하곤 했다(그게 빈말이 아니었던 것이, 그때 1학년 편집부원 후배는 로스쿨을 나와 변호사가 되었다). 사실은 그녀와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였는데, 선배가 나를 그녀의 친구와 엮어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 쪽에 더 마음이 있었다. 어설프게 마음을 전하기도 했지만 씨도 안 먹혔고, 워낙 어설픈 고백이어서 그녀와의 관계도 전혀 어색해지지 않았다.
‘진흙과 통나무’ 편집부로, 과내동아리 회원으로, 그녀는 나를 비롯한 많은 선배들과 어울리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녀는 그 시간들을 같이했던 선배들과 연락하거나 만나지 않았다. 물론 바빴을 것이다. 문창과에서 그랬던 것처럼 문단 내에서도 작가들과 어울리고 이런저런 대소사를 챙기고 술자리에 자주 참석했을 것이다. 또 편집자로서 좋은 책을 만든다는 자부심과 욕심으로 모든 것을 일일이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학창 시절 선배들을 꼭 만나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학창 시절이 부정적인 기억으로 남아있지는 않기를 바란다. 그녀가 어느 강연에서 “대학 시절 서정적인 시를 써야만 하는 강박관념이 있어 힘든 시절을 겪었다.”라고 말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혹시 문창과에서 별로 배운 것이 없고, 자신의 시적 재능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고, 그저 선배들과 웃고 떠들며 무의미한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녀가 보기에는 선배들이 사회에 나와서도 학창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살고, 혹 나처럼 성공한 그녀에게 이런저런 청탁을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A선배와 다녔던 출판사를 그만두기 전에 그녀가 소속된 출판사 어딘가에 자리가 없는지 물어보았던 적이 있다. 그녀는 “오빠는 절대 안 돼. 우리 회사에 그런 자리 없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역시 그녀가 괜히 성공한 게 아니다. 공사 구별이 확실하고, 내가 어쩌다 출판사에 발을 들여놓은 뜨내기 편집자라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의 학창 시절에서 한 가지 더 기억나는 게 있다면, 세상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숙면도 취하지 못하는 것 같았고, 세상이 확 무너져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회생활을 하고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하면서 정서적인 안정을 찾았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녀는 아직도 부정적으로 보이는 세상에서 버티기 위해 바쁘게 사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다. 밤새워 술 마시고 고스톱 치고 농담 따먹기 하던 예전 기억도 떠올려보라고. 자신을 소진시키거나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는 시간도 가지라고.
* 커버이미지는 중앙대 안성캠퍼스 정문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인데 맨 왼쪽이 B후배이고, 가운데가 나, 오른쪽이 졸업 후 안성에서 일하던 동기, 사진을 찍은 사람은 나에게 ‘진흙과 통나무’ 편집장을 맡긴 선배로 기억된다. 아마도 B후배가 졸업을 앞두고 기숙사 짐을 빼기 전날, 같은 학원에서 일하던 선배와 내가 안성에 내려가 그들을 만나 술을 마시고 다음날 아침에 학교로 같이 올라가던 길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