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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백 Aug 17. 2023

아빠는 나무늘보, 엄마는 불

아빠가 나무늘보라 엄마가 불이 됐구나.

며칠째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종이책. 출근할 때마다 눈에 띄는 자리에 있었다. 대단이가 학교에서 만들어서 가져온 것이었다. 종이를 여러 번 접고 접어 책처럼 만든 다음 아이들이 선생님이 주신 주제에 맞게 뭔가를 끼적이는 수업을 했나 보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각자의 기관에서 가져온 작품(?)들말 그대로 발에 차인다. 거실 바닥을 나뒹구는 작품들과 학습 교구들. 그 종이책은 그렇게 며칠을 거실 한편에서 조용히 처박혀 있었다.


최초의 발견자는 주중에 들러 엄마를 도와주시는 외할머니였다. 대단이의 종이책을 뽀뽀와 함께 보고 둘이 배를 잡고 깔깔깔 웃었단다. 뽀뽀가 건네주는 대단이의 종이책을 보고 나는 복잡 미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우리집 일일 도슨트가 되어 대단이의 동물그림책을 풀어 보았다.




아빠의 서식지는 안방 침대다. 아빠는 틈만 나면 안방침대에 누워 잠을 자거나 눈을 뜨고 있으면 핸드폰을 보고 있는데 그 특징을 너무나 디테일하게 잘 살렸다. zzz로 자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데 왜 눈을 부릅뜨고 있나 봤더니 두 가지를 다 표현하려고 했구나. 나무늘보는 그리기가 어려운 동물이라 아빠는 그냥 사람처럼 그렸다.


아이가 본 엄마의 가장 큰 특징은 화를 내는 것인가 보다. 그렇다. 집에서도 화를 내고 밖에서도 화를 낸다. 아이 둘과 함께 하는 시간이 제일 많은 사람이 안타깝게도 바로 나다. 그래서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이다! 이놈들아!!!(이 순간에도 또 화를 내고 있다.) 덧붙이자면 아빠가 나무늘보니 엄마가 불을 뿜으며 아빠를 소환하지.


일하는 엄마를 도와주시러 종종 집에 와 주시는 외할머니는 양처럼 순하단다. 양은 그리기 쉽구나. 매애~~~~ 아이들에게는 항상 없이 잘해주시고 맛있는 밥도 만들어 주시는 할머니. 도와주시느라 고생도 많이 하시는데 아이들이 할머니를 사랑으로 봐 주니 새삼 대단이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할머니도 물불 안 가리고 화를 내는 성미인데 아이들에게는 그런 모습을 안 보여준 것이니 그것 또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뽀뽀는 고릴라처럼 잘 싸운단다. 그 이야기가 재미가 있었는지 뽀뽀는 이후로 계속 고릴라 흉내를 낸다. 싸움의 원인을 대체로 대단이가 제공하기는 하지만 뽀뽀가 화를 내면 참 무섭다. 사자후를 질러대고 달려들어서 힘으로 오빠를 제압하기도 한다. 이미 예전에도 언급했던 천사 같은 뽀뽀가 야수로 돌변하는 순간이다. 맨날 동생에게 싸움 걸어대는 오빠는 동생에게서 잘 싸우는 모습을 가장 큰 특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이러니 그 자체다.


대단이를 보니 히히히히 하고 멋쩍게 웃고만 있다. 잘도 이런 그림책을 그려와서는 가족들과 공유도 하지 않고 방바닥에 처박아뒀단 말이지? 가족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재밌게 각색한 것도 아니고 진짜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인가..  대단이의 그림은 그릴 때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 빈말로도 잘 그렸다고 얘기하기 어렵지만 표현력은 좋아서 항상 이상한 감탄을 자아낸다. 이렇게 대충 그리는데 메시지가 다 전달이 된다니???


그런데 왜 너만 사람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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