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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백 Nov 03. 2024

하루에 하나씩, 나를 채우는 일

즐거움으로 나를 일으켜 보자.

바쁘고 정신없는 일상에 치이다 보면 '소진되다'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소진되다 : 점점 줄어들어 다 없어지다.


사라질 消에 다할 盡, 사라지고 다하다. 점점 줄어들어 없어지다. 점점 줄어들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말인가. 쓸쓸한 말이다.


무언가에 쫓기듯 소진되던 때가 있었다. 연륜이 미처 영글지 못했던 삼십 대 초반, 관리자에 의해 엄청나게 비효율적으로 굴러가는 부서에 배치됐다. 매일같이 아침 아홉 시에 출근해서 밤 아홉 시에 퇴근했고 부서의 상황이 악화되자 주말에도 끌려 나왔다. 문제는, 부서장의 종용으로 벌려진 수많은 일들이 하나도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성과도 보람도 없는 일에, 분위기에 떠밀려 나를 갈아 넣은 지 일 년 만에 나는 무너졌다.


좋아했던 것들이 참 많았었는데, 뭘 해도 즐겁지 않았다. 아무것도 나를 설레게 하는 것이 없었다. 나쁜 감정에 쉽게 매몰된 반면, 좋은 감정은 쉬 느껴지지 않았다. 일 년 만에 무너진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곱절의 시간이 걸렸다. 꺼진 불씨는 역시 다시 살리기 어려운 법이다.



십여 년 전의 순진했던 그때처럼 내 일상을 송두리째 갖다 바치는 일은 없지만, 엄마가 되면서 아이 둘의 일상까지 내가 짊어져야 하는 몫이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이들을 깨우고 아이들 준비물을 챙기고 매의 눈으로 등교하는 아이들을 끝까지 지켜본다. 까딱 방심하면 아이는 책가방을 깜빡했다며 교실에 앉아 있어야 할 시각에 집에 돌아올 것이며, 짝짝이 신발을 신고 학교며 학원이며 온종일 종횡무진 쏘다닐 것이다.


원체 정신이 없어 "아, 맞다!" "아, 맞다!"를 남발하여 붙여진 나의 별명 '아마따 상'. 이런 내가 세 사람의 생활을 챙기다니, 여간 힘에 부치는 것이 아니다. 한 시간 동안 할 일을 30분에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나만의 '시간과 공간의 방'에서 집 밖으로 나오는 십 분의 시간은 말 그대로 전쟁터다. 하루의 시작이 이렇게 파란만장하니, 일어났을 때 70 정도였던 나의 HP는 출근할 때 30으로 줄어든 상태.


나이를 먹었어도 여전히 원치 않는 일에 휘둘리기도 하고, 오며 가며 부딪히는 미운 사람이 전파하는 악한 영향력에도 쉽게 굴복한다. 하루 종일 나 자신을 지키는 데 적지 않은 에너지를 쓴다. 짜란~집에 돌아온 후 설거지할 때마다, 빨래를 갤 때마다 내 눈앞에 펼쳐지는 "오늘의 불쾌한 사건~". 울끈불끈 솟아오르는 감정을 억누다 보면 고된 육체노동을 마친 아저씨처럼 나도 모르게 냉장고에 쟁여놓은 맥주에 손이 간다. 나만의 길티 플레져 덕분에 늘어나는 건 뱃살, 잃어가는 건 기억력인가.


최선을 다해서 하루를 아가고 있지만 이상하게 그 안에 내가 없다. 내 손으로 일상을 설계하고 충실히 누리고 싶었는데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 갇혀 쳇바퀴만 굴리고 있는 것 같다. 정신 못 차리게 뛰어다니다 '살아가는 것이 아니 그저 살아지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날엔 왈칵 울고 싶어진다. 이러다 정말 내가 사라져 버리는 것 아닐까.


캄캄한 극장 속 빛나는 스크린을 좋아했던 나, 전철을 타고 타고 전시회를 보러 가길 좋아했던 나, 낯선 동네에서 먹는 밥을 좋아했던 나, 따뜻한 햇살 아래에서 책을 보고 있던 나. 그 반짝반짝했던 시간 속의 나는 어디로 간 걸까?


최소한 하루에 하나씩, 나를 채우는 일을 하기로 했다. 출근길에 하늘 보기, 30분 책 읽기, 노트에 그날의 생각, 느낌 적기, 좋아하는 에센셜 오일 향기 맡기. 그냥 생각만 해서는 아무것도 채우지 못한 상태로 하루가 끝나 버린다. 하루에 두 번 점검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점심시간 그리고 저녁 9시.


정신없는 오전에 마침표를 찍는 점심시간, 쉽게 나를 채울 수 있는 일을 한다. 식사 후 양치타임,  에센셜 오일로 기분을 전환하고, 날씨가 좋으면 하늘을 보면서 산책한다. 친한 직장동료와의 수다는 덤이다. 저녁 9시는 해야 할 일들을 대충 마무리한 시간이다. 이 날 책을 읽지 못했다면 책을 읽고 노트에 메모한다. 우애가 좋지 않은 아이들을 키우기 때문에 아이들을 떨어뜨려 놓는 것은 필수. 실패했다면, 보고 싶었던 영상을 본다. 이번 주의 영상은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수년간 보지 못했던 영화도 보기 시작했다. 금요일에 영화를 보고 '금요일엔 심야영화'라는 카테고리로 블로그에 기록을 한다. 극장에 가지 못한다는 이유로 집에서는 영화를 보기 어렵다며 그 좋아하던 영화를 안 본 지 십 년 가까이 되었다. 그동안 보지 않고 담아만 놨던 영화 리스트에서 하나씩 꺼내 보고 있다. 나를 채우는 최고의 시간이다.


정신없이 살아지면서도 문득 나의 시간이 쌓아 올린 것을 발견한 순간, 행복을 느낀다. 엉망진창인 집구석이 말끔하게 변했을 때, 아이들이 어느새 훌쩍 자라 엄마 등을 두드려 줄 때, 브런치에 한 편 한 편 올린 글이 어느덧 꽤 많아졌을 때. 차곡차곡 쌓이는 시간 속 행복의 찰나를 발견하려면, 나는 소진되는 대신 채워져야 한다. 하루에 하나씩 나를 위해 채우는 즐거움, 오늘은 뭘로 채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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