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이면 꺼내보는 편지
수요일 아침이면 엄마의 옷장을 뒤적였다. 탈북민 야학에 가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스물네 살이던 내게, 채용 담당 선생님은 신신당부를 했었다. 적어도 이십 대 후반은 되어 보여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나이 많은 학생들이 만만하게 본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 말을 떠올리며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풀었다 묶었다 반복했다. 신경 쓰이는 건 나이뿐이 아니었다. 내가 가르쳐야 하는 과목은 영어. 전공인 중국어라면 또 모를까 영어는 정말이지 자신이 없었다. 특히나 애를 먹이는 건 발음이었는데, 한 문장을 네다섯번은 읽어야 간신히 혀가 더듬더듬 제 길을 찾아갔다. 상황이 이러니, 가장 피하고 싶던 건 옆옆반 원어민 선생님과의 대화. 복도 끝에서 그의 길쭉한 실루엣이 보이기만 해도, 움찔했다. 재빨리 모퉁이를 돌며 이렇게 되뇌었다. ‘부르지 마라, 제발 부르지 마라.’
어린 나이도 빈약한 발음도 어떻게든 감춰보려던 나와 달리, 학생들은 숨김이 없었다. 쉬는 시간이나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그 짧은 사이에도 자기 이야기를 들려줬다. 검은 압록강을 헤엄쳐 건너다 엄마와 동생은 그만 총에 맞았다는 이야기나, 탈북 경로를 안내하는 브로커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기약 없이 중국을 떠돌던 이야기 같은 것들. 그중 나를 가장 벙찌게 만든 건 S의 말이었다. 분명 내 또래였지만 제 나이보다 한참 들어 보이던 S는, 옅게 웃을 때만 살짝 색채를 띄는 사람이었다. 그는 몇 년 전 새벽, 옆집 사람들을 따라 충동적으로 집을 떠났다고 했다. 자유의 땅에 가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혹시나 말릴까 싶어, 자고 있는 엄마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말이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난처해하는 나를 앞에 두고 그는 영어 본문을 읽듯이 덤덤하게 말했다. 이제는 엄마 얼굴이 잘 그려지지도 않는다고. 그런 말들을 곱씹으며 다음 수업을 준비하는 날에는, 생각이 길을 잃었다. 아무리 고민해도 내 안에는 꺼내 놓을 만한 말이 없어서. 고작 떠올린 건 명언을 찾아와 영어로 칠판에 적어보는 일 정도였는데 좋은 방법은 되지 못했다. 그들의 굴곡진 여정 옆에 나란히 세우면 어떤 문장도 밋밋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는 문장인데도.
이래저래 어설펐던 나를 선생 대접 해주던 학생들의 얼굴이, 오월에는 더 자주 떠오른다. 스승의 날이라고 써 준 편지들 때문인데 읽다 보면 눈길은 매번 같은 문장에서 멈춘다. '통일되면 선생님 손 잡고 저희 고향을 관광시켜 드리고, 선생님 학교를 세워드릴게요.' 학교를 세워준다니, 허풍 치지 말라고 웃어넘겨야 할 대목인데 이상하게 진심이 전해진다. 정말 캐리어 끌고 여행 가는 날이 오려나 싶은 마음도 든다. 편지는 이렇게 이어진다. ‘우리의 꿈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항상 건강하시고 만복이 차고 넘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꿈, 통일을 가리키는 말. 나는 통일이란 게 한반도에 경제적 위기인지 기회인지 혹은 정치적인 관점에서 평화통일이 가능하기나 한지, 잘 모르겠다.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시작하면 여전히 머뭇거린다. 그럼에도 매번 뜨문뜨문 말을 이어가게 된다. 단단하게 뭉쳐진 말이 아니라, 듬성듬성 쌓아 올린 주문 같은 언어로. 나는 바란다고. 어두운 강에 자신을 다 내던져야 했던 이들이 이제는 환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기를. 나아가, 엄마에게 인사도 없이 이렇게 멀리까지 와버린 S가, 너무 늦지 않게 ‘다녀왔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꿈꾼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