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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을 쫓아서···.

빛 아래 설 너에게 15.

by 다우

사람의 탐욕보다 흉측한 게 있을까, 싶을 정도로 쿠로 키츠네는 뒤틀린 욕망을 만천하에 꺼내놓았다.


“조선의 아름다운 계집들을 전부 내 노리개로 만들 것이다. 흰 살갗이 빨갛게 부어오르도록 거듭 탐할 것이다. 그 년들의 보드라운 살결을 치아로 잘근대며 씹을 것이다. 조선의 사내 녀석들은 우리 대 일본제국을 위해 뼈가 삭을 때까지 노동을 할 것이며, 그들이 캐온 조선의 자원들은 하나 남김없이 일등 시민인 본토인을 위해서만 사용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 황국시민들은 날이 갈수록 부유해 질 것이다. 천황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쿠로 키츠네는 미친듯이 웃어대다가 한울을 바뜩 쏘아보았다.


“그런데, 네 까짓게 감히 나를 생포하겠다고?”


쿠로 키츠네의 양 팔이 풍선처럼 점차 부풀어 올라, 옷이 터져나가고 있었다.


“고작 홀몸으로 흑호교를 제압하겠다고?”


붉게 번뜩이는 눈. 쿠로 키츠네의 두 허벅지 역시 불끈거리며 굵어져가고 있었다.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고 있는 그를 보고, 리아는 힘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교주님···. 교주님, 어째서···.”


리아는 변해가는 쿠로 키츠네의 형상에 극악의 공포에 사로잡혔다.


한울은 부채의 살을 넓게 펼치고, 미미하게 부채를 흔들었다. 그러자, 바닥에 빛을 내며 둥근 원이 그려졌다. 원 안에는 원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선들이 빠르게 자리잡았다. 부채의 떨림을 따라 바닥에 마법진이 그려지고 있었다.


쿠로 키츠네의 형상은 거대한 거인처럼 기이하게 변해갔고, 한울의 발 밑에 그려지는 마법진도 점점 그 형체가 정교해졌다.


쿠로 키츠네의 두 눈이 붉은 섬광을 쏘았다. 그는 아무런 전조 없이 한울에게 달려들었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또한 거대한 손아귀 힘으로 한울을 움켜잡았다. 한울은 부채의 살로 그의 굵고 커다란 손가락을 두어번 때렸다.


“으아아!”


쿠로 키츠네는 손가락이 부러진 듯 비명을 내질렀다.


“어리석은 여우야. 다짜고짜 덩치부터 키우니, 때릴 곳만 많아지는 구나.”


한울은 날렵하게 뛰어올라 쿠로 키츠네의 머리를 걷어찼다.


쿠로 키츠네는 두 주먹을 휘둘렀다. 거대한 주먹들은 전부 건물 내부에 빗맞았다.


“땡중, 연막이 필요해!”


한울의 외침에 호국은 즉시 젖은 부적을 하늘에 날리며, 수인을 맺었다.


젖은 부적에서는 뭉게뭉게,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방 안은 금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연기 속에 갇혔다.


눈 앞이 가려지자, 쿠로 키츠네는 짜증을 내며 고함을 쳤다.


그의 커다란 몸은 연기 속에서도 잘 파악이 되었지만, 상대적으로 작은 세 사람의 몸은···.


검은 연기 속에서 쉼없이 얻어맞고 있는 것인지, 쿠로 키츠네의 신음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쿠로 키츠네는 더 이상 안되겠다는 듯 커다란 손으로 수인을 맺었다.


음험한 일본어 주문이 이어지는 가 싶더니, 검은 연기가 삽시간에 사그라들었다.


한울은 즉시 그의 긴 머리채를 잡았다.


“애들 장난 같은 짓은 그만둬라.”


종이 인형을 칼로 바꾼 쿠로 키츠네는 조금의 주저없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렸다.


정갈하게 묶였던 머리카락은 우스스 흩어지며, 산발이 되었다.


쿠로 키츠네의 형상이 더욱 볼썽사나워지자, 리아는 탄식을 내뱉었다.


호국은 리아의 어깨를 감싸쥐었다.


“리아씨! 언제까지 이렇게 넋을 놓고 있을 생각이야!”


리아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바르게 섰다.


“제가 감히 쿠로 키츠네 님을 상대로···.”


호국은 리아에게 소리를 질렀다.


“잘 봐, 저 녀석은 그냥 역겨운 종교 사기꾼일 뿐이야!”


한울은, 쿠로 키츠네가 잠시도 숨을 돌리지 못할만큼 흠씬 두들겨 팼다. 구석에 박히듯 내몰린 쿠로 키츠네는 연신 피를 토했다.


한울이 부채를 접어 단단한 부채의 살로 놈의 정수리를 내리 찍으려던 그 순간이었다.


“네무레, 네무레. 나의 아이야!”


쿠로 키츠네가 득달같이 리아를 불렀다. 한울은 쿠로 키츠네의 머리를 내려찍으려던 것을 잠시 멈췄다.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교주의 모습에 리아는 울음을 터트리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허리의 병을 고쳐줄테니, 나에게 오려므나! 어서, 내 품에 안기려므나! 네무레, 네무레.”


“허튼 수작, 집어치워!”


한울은 쿠로 키츠네의 멱살을 움켜 잡은 후, 거대한 그의 몸을 땅에 메다꽂았다.


돌바닥이 우그럭, 산산히 부숴졌다.


바닥에 머릴 찧은 쿠로 키츠네는 허우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리아, 그래. 리아라고 했었지. 아이야, 내가 널 도화단원 중 최상급 단원으로 임명할테니···. 네무레, 네무레.”


“헛소리 그만 하라니까!”


한울은 쿠로 키츠네의 머리를 세게 걷어찼다. 피를 토한 놈은 중얼거렸다.


“내 너를 친히 안아 줄 것이니, 이리 오너라. 네무레, 네무레.”


리아는 교주를 향해 한 걸음 내딛었다. 호국은 눈을 크게 떴다. 리아의 눈에 촛점이 없었다.


“한울!”


호국은 리아를 붙잡으며 외쳤다.


“최면이야! 리아씨의 눈에 촛점이 없어!”


쿠로 키츠네는 연신 주술을 입에 담았다.


“네무레, 네무레.”


리아는 호국의 팔을 세게 깨물었다. 통증에 리아를 놓친 호국은 피가 흐르는 팔을 내려다보았다. 선명한 잇자국···.


리아는 결박되었던 몸이 자유로워지자, 빠른 속도로 교주에게 달려갔다.


쿠로 키츠네는 리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한울 앞에 리아의 몸을 드밀었다.


인간 방패가 된 리아는 여전히 눈에 촛점없이 교주의 손에 이끌리고 있었다.


한울은 부채로 칼날같은 바람을 쏘려다가, 리아의 몸이 시야에 들어오자 멈칫했다.


그 때였다, 리아의 등 뒤에서 종이 인형이 날아올랐다. 쿠로 키츠네가 던진 거였다.


종이 인형은 벼락의 형상이 되어 한울의 몸을 번쩍, 때렸다.


“아악!”


한울은 비명을 내지르며 무릎이 꺾였다.


쿠로 키츠네는 리아의 몸 뒤에 숨어서 종이인형으로 벼락을 여러번 빚어냈다.


한울은 피하기만 할 뿐, 리아의 몸을 선뜻 공격하지 못했다.


“하하하, 나약한 녀석! 이 따위 계집이 뭐라고, 아까같은 공격은 하나도 못하는구나!”


쿠로 키츠네의 도발에 한울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놈은 이기죽 거렸다.


“조선의 사내 놈들은 참 재미있단 말이야. 곧 죽게 생겼어도 낭만을 쫓지.”


한울은 벼락 맞은 곳을 짓누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쿠로 키츠네는 혀를 놀렸다.


“그래, 네 놈들은 그래서 우리를 이기지 못하는거야. 사랑하는 계집의 성씨를 지켜주는 것부터 글러먹은 것이다. 혼인을 했어도 아내조차 소유하지 못하는 무능한 존재들···. 아내의 성씨조차 바꾸지 못하는, 진정 한심한.”


쿠로 키츠네는 리아의 뒷 목을 혀로 핥았다.


“마음에 둔 계집이 다칠까봐, 그리도 걱정스러운가. 응?”


리아의 허리를 감싼 놈의 팔, 그리고 목을 지분거리는 혓바닥을 바라보는 한울의 눈이 검은 표범처럼 빛났다.


한울은 부채를 품에 넣었다. 그리고, 모든 원한의 적을 꺾어 항복을 받을 때 사용하는 금강저수 金剛杵手 진언을 읊기 시작했다.


“옴 발라 그니 쁘라 디입따야 스와하···.”


금강저수 진언이 소리로 발현되자, 앞서 한울의 발 밑에 그려졌던 마법진이 강렬한 빛을 쏘았다. 빛은 사슬처럼 묵직한 소릴 내며 쿠로 키츠네와 리아를 덮쳤다.


빛의 매듭에 꽉 사로 잡힌 두 사람은, 옴짝달싹 못한 채 바닥에 쓰러졌다.


한울은 저벅저벅, 놈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리아의 허리를 감고 있는 팔을 반대 방향으로 틀어 부러뜨렸다.


“아악!”


쿠로 키츠네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한울은 놈의 입 속에 손을 넣어, 혀를 움켜잡았다. 뽑아버릴 기세였다.


“한울! 의뢰 내용은 생포하라는 거였잖아!”


호국의 외침에 한울은 멈칫했다. 그의 어금니에서 으득,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울은 놈의 품에서 리아를 꺼내 호국에게 밀었다.


“경고하는데, 뒤에서 하릴 없이 서 있지만 말고, 내 것 잘 챙겨.”


호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촛점없는 리아의 몸을 안아들었다. 한울은 작게 중얼거렸다.


“하마터면 처음으로 의뢰를 실패할 뻔 했군···.”


쿠로 키츠네는 빛에 감겨 바닥에서 허우적거렸다.


한울은 놈의 머리에 발을 올려놓았다.


“아내의 성씨를 본인 성씨로 바꾸는 게, 보잘 것없는 네 놈들 인생의 유일한 업적인지 몰라도···.”


한울은 발에 힘을 가하기 시작했다. 쿠로 키츠네는 비명을 내질렀다.


“사랑하는 상대의 성씨. 그녀가 살아온, 쌓아온 역사를 존중하면서도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을, 우린 알고 있거든.”


한울이 자신의 발에 가한 힘 때문에, 바닥이 움푹 파이고 있었다. 쿠로 키츠네의 짓눌린 얼굴은 우둑우둑 뼛소리까지 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을 존중하는, 세상을 대하는 방식의 차이가 아닌가 싶다.”


한울은 힘이 실린 발을 천천히 비틀었다. 쿠로 키츠네의 비명소리가 더욱 더 커져갔다.


“그래, 우리는 네 놈들과 달라. 우리는···.”


광대가 완전히 함몰된 쿠로 키츠네의 얼굴을 세게 걷어차며, 한울은 큰 소리로 말했다.


“낭만을 쫓지!”


벽으로 날아간 쿠로 키츠네는 피를 토했다. 그는 으깨진 얼굴로 부들부들 떨었다.


한울은 속이 후련한 듯 기지개를 켰다.


쿠로 키츠네는 피를 토하며,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아지매阿知女 오오오오於於於於, 오게 於介···.”


난데없이 아줌마를 찾는 녀석을 보고, 한울은 고개를 갸웃했다. 쿠로 키츠네는 눈을 감고서 더욱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오게 於介, 아지매阿知女 오오오오於於於於, 오게 於介···.”


녀석의 목소리가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주변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머지않아 3명의 신령이 허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아, 강신의 축문을 외우자 마자 강림하셨군요!”


쿠로 키츠네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면서, 킬킬대며 웃어댔다.


“아지매 阿知女 법으로 임하신 소노카미 園神 와 카라카미 韓神 신이여!”

“소노카미와 카라카미?”


한울과 호국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쿠로 키츠네는 피로 물든 치아를 자랑하며 함박 웃음을 지었다.


“우리 대일본제국의 천왕가에서 천년, 아니 천오백이 넘도록 제사를 지내고 있는 세 명의 한국신, 궁내성좌신삼좌 宮內省坐神三座 다. 원신과 한신이라 불리는 이들은, 과거 신라인과 백제인으로 추정되지만···.”


쿠로 키츠네는 비릿한 웃음을 지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왕궁 안에서는 이 세 명의 신에게 춘추로 제사지내고 있지. 제사의 명칭은 한신제와 원신제. 너희 조선인들의 숨통을 끊기에 아주 적합한 신이 아니겠느냐.”


“아지매가 무슨 뜻이냐?”


한울의 물음에 쿠로 키츠네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신령을 부르는 영신가迎神歌일 뿐으로, 본 뜻은 학자들도 모르는···.”

“경상도 말로 아주머니라는 뜻이야.”


한울은 부채를 꺼내 들었다.


“오게, 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네 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오게,라는 말은 오시라, 라는 의미의 한국말이야. 너희는 말의 뜻 조차 모르면서, 한국인 신령들을 섬기며 제사를 치루고 있던거야.”


쿠로 키츠네는 자존심이 상했던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는 손을 하늘로 뻗어 허공에서 맴돌고 있는 신령들에게 소리쳤다.


“영험하신 소노카미와 카라카미여! 저 건방진 조선인을 무참히 벌하시옵소서!”


원신과 한신은 쿠로 키츠네의 기도에 감응하듯 일렬로 정렬했다.


공기의 압력이 달라지는 듯, 바닥이 움푹움푹 파이기 시작했다. 중력이 높아지는 것처럼 위에서 알 수 없는 힘이 세 사람을 찍어눌렀다. 한울의 몸이 바닥에 박히듯, 아래로 내리 꽂혔다.


“으으아···!”


고통스러웠던지 한울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공기의 밀도가 달라지자, 신령들은 그제서야 움직이기 편안해졌는지 긴 숨을 내쉬었다. 신령들이 갖고 있는 힘은 얼핏 느끼기에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에 한울과 호국의 두 눈에 공포가 담겼다. 쿠로 키츠네의 웃음소리가 귀를 아프게 때렸다.


뭉그러진 얼굴로, 여우는 말했다.


“한국인들을 모조리 학살해라! 소노카미와 카라카미, 고대 한국의 신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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