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인 Jun 27. 2023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진상 손님을 팬으로 만든 방법

같은 동네에 사는 주변 이웃들이 가장 싫어하는 행동은 무엇일까? 층간 소음? 화장실에서 담배 피우기? 분리수거를 잘 안 하는 이웃? 개인적으로는 아무에게나 반말을 하며 항상 짜증스러운 말투를 쓰는 아저씨도 그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아파트 단지 앞 편의점 파트타임을 하던 시절, 매일 새벽 1시 같은 시각에 편의점에 오던 아저씨 손님 한 분이 있었다. 그 손님은 항상 누가 조금만 건드려도 큰일을 낼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에세이 한 갑 가져와


소주 두 병, 맥주 한 병, 마른오징어, 라면과 함께 돈을 툭 던지며 말하는 아저씨의 대사였다.

그 모습을 보면 마치 악덕한 스쿠루지가 떠오르곤 했다. 그 스쿠루지 아저씨는 아무도 나에게 다가오지 말라는 모습으로 매일 새벽 편의점 앞에서 혼자 술을 훌쩍이고 담배 한 갑을 연거푸 피우고는 했다.


그분이 지나간 자리는 항상 혼돈의 카오스였다. 주변 온 자리에 담배꽁초며 담배를 끈 흔적이 여기저기 묻어있었다. 그리고 각종 어질러진 병들이나 라면국물이 쏟아진 자리를 청소하는 것은 내 업무 중 당연한 하나가 되어 있었다. 편의점 알바를 하며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낮은 시급도, 물건 정리도, 편의점 청소도 아닌 그 진상손님을 매일 보는 일이었다.


매일 같은 패턴이 흐르던 어느 날, 의도하진 않았지만 우연히 그 아저씨가 나누는 통화 내용을 듣게 되었다. 미국에 있는 딸과의 통화였다. 내용을 살짝 들어보니 아내와 딸이 미국에 가 있었고, 혼자 기러기 생활을 하고 계신 것 같았다. 딸과 통화를 할 때의 그분은 같은 사람이라고는 전혀 생각 못할 정도로 온화한 미소와 사랑스러운 말투를 사용하고 있었다. 저렇게 못돼 보이는 아저씨도 자기 딸에게는 세상 천사일 수 있구나 사랑의 위대함(?)을 느꼈다.


어김없이 새벽 1시 소주와 담배를 사시는 아저씨께 슬쩍 말을 걸어보았다. "딸이 미국에 사시나 봐요?" 갑자기 말을 건네니 살짝 벙 찐 표정으로 나를 보시더니 금세 표정이 밝아지시며 중학생 딸이 미국에 살고 있다며 대답을 해주셨다. 그때부터였다. 오래된 친구와 이야기하 듯 그 손님은 내게 딸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해주셨다. 어렸을 때 피아노 영재소리를 들었고, 미국에서 논술발표를 너무 잘해 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대회에 나갔고, 아빠를 너무 좋아해 매일 사랑한다고 이야기해 준다는 등.. 숨 쉴 틈도 없이 딸의 이야기를 이어 나가셨다. 나는 별다른 대답은 안 하고 와~ 그러셨어요? 대단하네요! 와 같이 중간에 리액션만 했을 뿐인데 우리의 대화는 2시간이 넘도록 이어졌다.


그다음부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매일 도깨비 같은 표정을 하던 아저씨가 하회탈처럼 밝게 웃으시며 편의점에 들어오셨고, 아주 다정한 말투로 담배를 주문하셨으며 돈도 정성스레 건네주셨다. 가끔은 내게 일하느라 힘들지 않냐며 사탕 같은 것들을 건네주시기도 했다. 하루는 옆자리에 라면을 먹고 치우지 않고 가려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두고 가면 편의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힘드니 치우고 가라는 말까지 대변해 주셨다. 불과 며칠 전 내가 알던 그분이 맞나 생각하며 살짝 웃음도 났다.


이 작고 아담한 공간에서의 경험은 지금까지도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고 있다. 마음을 열고 내게 다가오는 상황들에 잘 귀 기울이면, 어떤 곳에서든 좋은 배움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설령 다른 사람이 먹던 라면 국물을 매번 버려야 하는 일상 속에서도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