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공지능의 발전 방향
한 초등학생이 친구들과 다퉜다.
화가 난 아이는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욕을 뱉었고.
그 소리를 들은 선생님이 달려와서 아이를 혼냈다.
“아무리 그래도 욕을 하면 어떡해!”
본인의 마음을 몰라준 게 속상했는지
비 오는 날 우산도 없이 학교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우산을 들고 쫓아갔고,
내 허리까지 오는 작은 아이에게 우산을 씌워주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그 아이는.
가정환경이 좋지 못했고 항상 분노가 많았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친구들과 다툼이 잦았다.
그저 아이의 속상함을 들어주고
위로와 괜찮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아이는 욕을 하지 않고 억울함을 해소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고, 그날 이후로 나는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다.
나는 노력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아이뿐만 아니라
더 많은 아이들이 각자의 상처를 지니고 있었고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아이들을 돌보는 방식이 아닌
공평하게 모든 아이들을 방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나는 모든 아이들을 돌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나만의 방식으로.
저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한다면 아이들의 슬픔을 좀 더 가까이서 지켜봤다는 점입니다.
2년간 아동센터에서 공익을 하면서 불후한 환경으로부터 다른 어린이보다 큰 아픔을 짊어지고 사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냉정하게 말해서 저는 아이들의 현실을 바꿔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힘든 아이들을 위로해 줄 서비스를 만들거나 서비스를 위한 밑바탕이 되는 기술을 만들 수 있습니다. AI 기술의 적응력은 아이를 더 좋은 환경에 놓이도록 만들 수 있을까요?
인공지능은 산업적으로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좀 더 편안해졌고, 시간이 절약된 만큼 더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죠. 이러한 장점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인공지능 기술로 생산성이 올라간다.
마치 모모에서 시간을 더욱 단축하게 만들어 준 회색 신사 같습니다. 이 문장의 치명적인 단점은 더 많은 편의를 제공하는 측면만 보여준다는 게 아닐까요. 생산성이라는 단어는 보통 작은 수에서 큰 수로 무언가 늘어나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방식의 인공지능 발전도 물론 중요하지만, 제가 원하는 인공지능은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는 기적입니다.
인공지능 기술로 슬픔이 즐거움으로 바뀐다.
물론 슬픔이 인생에 도움이 될 때도 있습니다. 저도 그 사람들 중 한 명이니까요. 그러나
(1) 슬픔과 기쁨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사람과
(2) 슬픔 속에서 대단히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사람들은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갑니다.
긍정적인 흐름 속에서 사람들이 얻은 생산성의 양만큼, 혹은 그 절반이라도
슬픈 사람들을 위한 인공지능 발전 방향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머릿속에서 상상하는 대부분의 서비스는 AI로 만들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특히 인공지능의 범용성을 많이 체감하는 사회가 만들어졌습니다. 지금은 만들 수 없을지라도 몇 년 뒤에 마주할 인공지능은 꽤 많은 상상 속의 서비스를 제공할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우리가 실제로 신경 쓰는 기술만 정교해집니다.
마치 최근에 텍스트가 어느 정도 잘 작동하니 이제 연구자들은 영상 생성 AI를 많이 진행되는 것처럼요.
발전 과정에서 기술의 정교함을 결정하는 것은 수요와 공급입니다.
만일 우리가 발전 방향을 선택할 수 있다면,
바꿔 말해서 수요를 정하고 공급 방향을 선택할 수 있다면,
저는 보편적으로 인류의 행복을 증진시킬 기술이 선택되길 바랍니다.
많은 기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입니다.
우리 삶을 바꾸기도 하고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는데 필요한 지혜를 배우는 기본적인 소양입니다.
문제 해결능력은 지속적인 교육을 통해서 해결되고, 보통의 경우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은 학교에서 배우거나, 부모로부터 배우는 게 일반적입니다. 부모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아이라면 말이죠.
친구와 싸우고 나서 화해하기 위해서 말하는 것조차 학습이 필요했고, 인공지능을 통한 교육은 가정환경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해 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업에 대해서 논한다면 이런 말이 들릴 수 있겠죠.
"인공지능 기술로 월 XXX를 벌었대!!"
저는 이런 방식의 인공지능을 원하지 않습니다.
결국 제가 보고 싶은 세상은 금전적인 세상이 아니라, 이런 말이 들려오는 세상인 것 같습니다.
"인공지능으로 속상했던 일이 잘 해결되었어."
"인공지능 기술로 불치병의 해결 방법을 찾았대!"
세상은 얻는 자가 있으면 잃는 자가 있는 제로썸이고, 나의 행복이 누군가의 불행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AI가 있으면, 양적으로 더 많은 것들이 제공될 수 있으니, 제로썸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쟁사회를 거친 우리는, 제한적으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제로썸을 강제할 본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논의가 필수적입니다.
정보는 돈이 됩니다. 나의 가치는 내가 알고 있는 것들로부터 생겨나는 거죠. 반대로 다른 사람이 나보다 적은 정보를 가진다면, 나는 상대적 우위에 서게 됩니다. 이 사회 게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득을 보고 모르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손해를 봅니다. 결국 기술의 사용도 불평등을 점진적으로 만들어나가면 내 이익을 최대화할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정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GPT에게 물어볼 수 있는 권리를 대가를 지불하면 받을 수 있지만, 나중에 금전적인 차이를 바탕으로 제공되는 정보의 차이가 발생될 가능성이 큽니다. 사회와 인공지능 서비스에서 주의 깊게 볼 격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인공지능의 접근이 가정환경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결정되는 부분.
2. 인공지능의 정보가 가정환경에 따른 정보를 제공한다.
1번은 접근 자체에 대한 논의, 2번은 사람에 따라서 다른 답을 주는 인공지능의 선택적 대답을 나타냅니다. 이 차이는 단순히 사회적인 합의의 문제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술적인 문제를 포함합니다. 대단히 똑똑한 사람의 질문에 제공되는 정보와 지식이 부족한 사람에게 맞춤형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정보량의 차이를 나타냅니다. 대표적으로 OpenAI는 질문자의 수준에 맞춰서 이미 답변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링크]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공지능 사회에서 많은 정보가 쉽게 접근 가능하겠지만, 정보에 대한 격차는 발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류는 정보가치를 격차를 유지한 채성장할지, 모두 동일한 양을 제공하여 격차를 없앨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과거부터 기술 발전은 언제나 선택적이었고,
투자, 소비, 전쟁과 같은 큰 물줄기를 따라서 흘러갔듯이,
인공지능 발전도 그렇게 흘러가겠지만,
그 바람 속에서 개인은 자유롭게 선택할 의지가 있습니다.
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만
좀 더 건강한 방향의 인공지능에 기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지만,
그럼으로써
아픈 아이들을 하루라도
웃게 만들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묵묵히 책임을 짊어지고.
아이들이 웃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