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드는 생각들
내가 일하는 병원 환자들 중엔, 가끔씩 거두절미하고 의사랑 전화를 해야겠다는 요청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날 오후도 내 외래 환자 중에 한 명이 이러한 메시지를 나에게 남겼고, 난 별생각 없이 전화를 걸었다. 그 환자는 이미 외래에서 몇 번 진료한 적이 있어 잘 알고 있는 환자였다. 그날, 전화상으로 그 환자는 나에게 어떠한 서류를 작성해 주길 원했지만, 나는 그에게 의학적인 소견으로 비추어 그러한 서류를 작성해 줄 수 없다고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갑자기 돌변하면서, 나에게 격분을 토해내면서 험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그는 항상 젠틀한 사람이었다.
뭐 여러 가지 말들이 두서없이 나를 향해 쏟아졌다. 정신없도록. 나도 사람이기에 그렇게 정신없이 나를 몰아세울 때면, 당황하기 마련인데,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서, 말을 시작하기 전 1초씩 의식적으로 참고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의사로서의 대화법을 이어나갔다 (굉장히 힘들었지만).
그런데, 그 사람의 이 대화의 끝 즈음에 남긴 말이 강렬했는데.
"넌 영어에 액센트가 있어"
"미국인을 싫어하냐?"
이 말을 들은 순간, 이제 더 이상 이 대화는 의미가 없겠다는 확신이 들었고, 그리고 거기서 대화를 최대한 짧게 그래도 예의를 갖춰서 종료할 수밖에 없었다. 웃긴 것이, 그 환자는 계속 나에게 포고했다.
"넌 해고됐어. 더 이상 내의사가 아니야"
지금 생각해 봐도, 누가 누구를 해고한 것인지 모르겠다. 다시 한번 숨을 쉬고, 난 알았다고 내 "해고"를 인정했고, 난 다른 의사를 찾는 것도 알아봐 주겠다는 비굴한(?) 톤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는 아마 이 대화에서 그가 이겼다고 생각할 테다. 그리고 그게 사실일지도 모른다.
나는 어차피 그 사람 인생에서 해고를 당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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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날 당일 전화 이후 막상 난 아무렇지도 않았다. 말의 내용 자체가 상식적인 선을 벗어 나는 무례함으로 가득한 일방적인 인신공격이 많았기에, 과연 그 내용들을 하나씩 곱씹어 가면서, 내가 얼마나 마음에 상처를 받았나, 뭐 그렇게 고민해 보고 분석해 보진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더군다나, 나는 어차피 항상, 미국과 한국 그 사이에 어딘가에서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면서 내 지난 20여 년을 살아왔기에, 그 누군가가 나보고 진짜 미국인이 아니라고 한다 해도, 그게 나의 정체성에 큰 충격으로 다가오진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래 난 어차피 미국인도 아닌데, 뭘"이라는 정말 유요한 방어기제가 내 안에 견고히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해야 하나.
그럼에도 내가 이러한 차별적인 코멘트들이 불편하게 느끼는 이유는 뭘까.
그건 아마, 내가 미국인이 되고 싶어 할 것이라는 그들의 잘못된 선입견인 것 같다.
내가 외국인으로서 미국에 와서 공부를 하고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삶의 터전을 내리고 살기에, 나는 미국인이기를 갈망하고 미국생활을 동경하며 살 것이라는 잘못된 assumption. 지난 20년간 유학생활을 시작으로 미국에서 의사가 되기까지, 내가 자의로서 선택한 부분도 있지만, 타이밍과 환경에 의해서 내 인생의 진로와 방향이 형성된 부분도 많았고, 그 와중에서 나는 항상 미국과 한국 그 사이 어딘가에 내 마음을 두고 살았던 것 같다. 결국 한국에도, 미국에도, 그 어느 한 곳에서 100%의 마음을 두지 못했던 내 모습이 정말 온연한 나의 정체성인데. 아마 겉으로는 나도 그 여느 이민자들처럼 미국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려는, 미국인으로 동화되려는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미국인 또는 미국이민자로서의 삶을 목표로 갈망하고 살아가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아니다. 내 주위의 대다수의 한국인 또는 외국에서 온 지인들은 대부분 이러한 목표를 가지고 미국에서 정착하여 잘 생활해나가고 있다. 오히려 그렇게 확고한 목표와 정체성의 지향점이 있는 것이 부럽기도 한 적도 많았다. 나는 왜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어렵게 생각하고만 있는 것일까 스스로에게 질문하면서 말이다.
근데 난 아직도 내 깊은 마음속을 잘 모르겠나 보다. 미국에서 그렇게 긴 노력 끝에 의사가 된 후, 그리고 여기에서 내 가족과 함께 일상을 꾸려 나아가면서도, 겉으로는 꽤 미국에 적응하며 살고 있다고 느끼지만, 아직도 근본적으로, 내 마음은 그래도 미국과 한국 그 사이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내가 마치 정말 미국인이 되고 싶어 할 거라는 듯한 선입견으로 나에게 외국인임을 각성시켜 주는 저러한 차별을 받았을 때, 난 다시금 되뇐다.
난 정말 얼마만큼 미국화되었고, 얼마만큼 미국인이고 싶었던 것일까?
아직도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선, 이에 대한 답이 아직도 어려운 것 아닌가 싶다. 그렇게 지난 20여 년간 많은 시간과 고민들을 이 미국 땅 안에서 해왔고 살아왔지만, 난 아직도 내 정신적 고향을 한국으로 여기고 있고, 나에게 있어 어린 시절 추억이라 하면, 한국의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내 아이들과는 집에선 한국말로 대화하고, 너무나도 자연스레 한국 가요를 듣고, 꽤 자주 한국 뉴스와 영상을 접하면서, 그렇게 겉으론 미국이민자, 안으론 한국인처럼 살고 있으니 말이다.
언제쯤 난 정말 마음 편히 온연한 미국인으로 스스로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 아님 그게 가능하긴 한 것인지 알 수가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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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내 아이들은 나중에 커서 미국 땅에서 저런 말들을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들은 여기서 태어나고 여기서 유년시절을 보냈으니,
그러한 아이들이 저런 말들을 듣게 된다면 얼마나 상처가 될까.
상상만 해보아도 마음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