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카레를 먹고 집에 가기로 했다. 동네에 카레집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시부야로 향했다. 시부야역에서 15분 걸어 자그마한 가게문을 열었다. 테이블 없이 바 형태로 된 작은 가게였다. 젖은 우산을 탈탈 털어 정리하고 자리에 앉으니 부드러운 카레향에 노곤해졌다.
"저희 가게는 처음이시죠?"
"네, 사실 시부야가 오늘로 두 번째예요."
"아, 근처 사람이 아니신가 봐요!"
"네, 한국 사람이에요."
사장님은 요즘 혼혈이 많아 일본인과 한국인 구분이 어렵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먼 곳에서 오셨으니 맛 좀 보라고 스지카레를 조금 주셨다. 지금까지 먹어본 카레 중에 손에 꼽을 수 있는 맛이었다.
"이곳까지 오길 잘한 것 같아요! 정말 맛있네요."
한국에서는 절대 하지 않을 말을 외국에 나오면 자주 한다. 지나가는 바람에 기분이 좋길 바라는 마음에 한 마디 덧붙인다. 그들의 기분이 바람이 되어 나에게 불어 오길. 사장님은 신이 나서 시부야의 이곳저곳 추천해 주셨다. 아, 이 순간이 오래가기를. 스치는 인연이 마음을 뜨끈하게 지핀다. 도쿄에 다시 오고 싶은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한 숟갈 뜨는 게 아쉬워 괜히 더 오물거렸다. 사장님은 휴대폰을 꺼내 뒤를 돌아 꼼지락 거리더니, 다 먹어갈 때쯤 번역기를 눈앞에 내밀었다.
'와 줘서 고마워요! 당신과의 대화가 참 즐거웠어요! 맛이 있었다면 구글 리뷰 부탁드려요.'
투박하고 어딘가 어색한 번역기 말투에 웃음이 팡 터졌다.
"감사합니다. 리뷰 꼭 쓸게요. 정말 맛있어요."
사장님의 눈은 열정으로 빛났다. 자신감과 자부심도 흘러넘쳤다. 분명 이 카레 한 그릇에 아주 많은 정성을 쏟았으리라. 썩은 눈깔을 하고 있던 많은 아르바이트생들의 얼굴이 스쳤다. 화장실에서 공포에 잠겼던 내 눈알을 떠올렸다. 나도 저런 눈을 갖고 싶었는데. 어쩌면 처음 앉았을 때부터 마주쳤던 그 눈이 부러워서, 괜히 말을 걸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의 그 에너지가 내게 바람으로 불어오길.
구글 리뷰를 쓰며 사장님이 추천해 준 북카페로 향했다.
북카페로 가는 길, 10명 남짓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시끌벅적한 것 보니, 작은 버스킹을 하는 것 같았다. 자그마한 체구에 여우 가면을 쓴 여자가 사람들 앞에 서 있었다. 남들보다도 작은 체구였는데, 존재감만은 확실했다.
"이 여우 가면은 잊지 못하시겠죠? 저는 우니입니다! 꼭 기억해 주세요! 여우 가면을 쓴 우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여자는 수시로 자기가 누구인지 외쳤다. 그래, 잊을 수 없다. 여우 가면과 이름 때문이 아니라, 꿈을 향해 달려가는 게 아주 멋져서. 숨이 벅찰 때는 없을까? 넘어지는 게 무섭지 않을까? 어떻게 당신은 힘차게 달릴 수 있나요?
한참을 서서 공연을 지켜봤다. 7월에는 첫 콘서트를 한다고 했다. 내가 일본에 살고 있었다면 바로 신청할 텐데. 이럴 때는 한국인인 게 참 애석하다. 나는 그저 흘러가는 바람일 뿐인데. 비가 되어 저 앞에 웅덩이가 되고 싶다. 분명 뜨거운 열기 앞에 자리 잡으면 증발해 없어지겠지. 그럼 다시 모아 빗물이 될 테다.
아, 나는 저런 삶을 살고 싶구나.
나, 저런 삶이 살고 싶어.
하루하루가 아주아주 소중해서 눈이 시린 삶.
그리고 한 발짝 내 꿈에 매일 다가가는 삶.
뜨겁고 뜨거워서,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삶.
"할 수 있을까?"
그가 나타나 내 손을 잡았다. 불안하게 떨리던 손이 단단히 고정되었다. 그는 쪼그리고 앉아 발목의 족쇄를 풀었다.
"자, 이제 발도 자유롭네. 어때, 뛸 수 있겠어?"
"무서워."
그는 다시 손을 단단히 잡았다.
"내가 항상 곁에 있어 줄게."
도쿄의 마지막 날, 뜨끈한 바람이 내 머리칼을 스쳤다. 자유로운 팔과 다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대로 쪼그리고 앉아 울었다. 바람아 계속 불어라. 나를 태워 저 멀리멀리 날아가라. 나도 자유로운 바람이 될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