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감정

by 은호


문득 당신이 떠오를 때가 있다.


저기 깊은 깊이 깊이 가라앉은 땅밑 아래아래의 저 곳으로부터. 당신의 이름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나는 모르는 내가 된다.


조금 전 나는 번잡하고 번화한 거리의 한복판에 있었다는 것을 모르게 된다. 어디선가 내 이름 같은 당신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서. 고개를 돌려 보고. 이곳을 바라보지만. 저곳까지 어디에도 당신은 없다. 당연하지.


나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나는 모르지만 알 것도 같다. 당신이 늘 잡았던 내 오른손은 당신이 쥐던 것처럼 꼬옥한 느낌이라 손가락을 풀지 못하는데. 그럼 나는 문을 열고 글씨를 쓰고 물건을 집는 데에 왼손만 쓸 수 밖에 없다. 친구도 가족도 친척 중에도 왼손잡이가 한 명도 없어서. 나는 아무도 나를 모르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만 평범하게 왼손으로 핸드폰을 꺼낸다.


이상하지. 연락처라고 되어 있는데. 당신의 이름이 없는 걸. 즐겨찾을 번호가 즐겨찾는 자리에 없는 걸. 오른손잡이가 왼손으로 핸드폰을 만지다 보면. 연락처를 뒤적이길 왼손으로 하다 보면. 그러다보면 실수로라도 뭔가 누르려 하지 않았던 것도 누를 수도 있는데.


건물에 들어서기 전에는 아프라는 듯이 내리던 비가 잦아들어 있고, 충분히 말라 비에 적셔질 준비가 된 우산은 접혀진 채 손에 쥐여 있다. 마시기로 한 와인은 묵히느라 집에 있고, 약속자리로 잡은 가게에는 술을 팔지만 나는 아직 마시지 않았지. 맑은 정신에 취하지 않은 내가 실수로 너를 누르게 될까봐. 취했던 어느 날의 나는 너를 지웠었나. 보다.


한번 더 비가 내리면 기억이 날 것도 같은데. 네번째 자리부터 울려야 할 번호들이 빗소리타고 오기까지, 나는 너를 조금 더 기다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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