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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백담 Jun 04. 2023

우린 처음부터 글렀어.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마

우리에게 사랑이 어디 있니

입바른 말로 나를 속이려 들지 마

나는 처음부터 네 속을 다 꾀고 있었어


미래를 꿈꾸지 말자

지금처럼, 딱 지금처럼만 이어가자

서로의 눈빛을 꿰뚫으며 속내를 씹어 삼키자

부끄러운 속을 보여줄 때는 소리 내 웃자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이렇게 이어가자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

이상하고 기묘한 사이에 놓인 채로

끊어지지 않는 줄다리기를 하자


구태여 사랑을 느끼려 애쓰지 말자

아름답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사랑에 이름을 붙여 무얼 하겠니

진심인 척 같잖은 사랑을 흉내 내지 말자

서로를 적당히 갉아먹고 양분을 내어주며 공생하는 관계로 기억되자


우린 처음부터 글렀어

한 번도 서로를 믿은 적이 없었지

불신과 불안, 경멸과 환멸이 우리를 사랑하게 만들었어

그 감정을 계속 간직한 채 사랑하자

사랑한다 말하지 않고 서로를 미워하자

애증 역시 사랑이지 않니

그 정도의 감정으로도 우리는 살아갈 수 있어


우린 처음부터 글렀어

그러니까, 더 이상 무언가를 바라지 말자

그저 서로를 사랑만 하자

그렇게 영원히 미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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