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각을 방해하렴

by 거북이

사랑하는 나의 조카 웜우드에게


요즘 네가 맡은 인간 ‘환자’가

유물론자 친구와 자주 만나도록 신경쓰고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순진한 거 아니냐?

원수 역시 논리와 이성에 강하지.

논리로 싸우려들 때 오히려 인간들이 원수의 편에 서게 만들 위험이 있다.


괜한 시간 낭비하지 말고,

노련한 너의 삼촌 스크루테이프가 인간 환자를

확실하게 망가뜨릴 비법을 전수해 줄테니 잘 배우도록 하거라.


우리의 목표는 단 하나, 그가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방해 하는 것’이다.


언젠가 내가 맡았던 환자 중에 골수 무신론자가 있었지.

그는 대영박물관에서 책읽기를 즐겼지.

어느 하루, 아차 하는 사이에 원수가 환자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지 뭐야.

20여년간 쌓았던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 같아 아찔해서

하마터면 논증으로 방어할 뻔했지 뭐야.


하지만 노련한 악마 중의 악마인 내가 그런 바보짓을 할 리가 없지.

나는 그에게 ‘ 배고프지 않느냐? 점심 좀 먹어야 할 때다’라고 달콤하게 속삭여 주었다.

원수 역시 ‘이 문제는 점심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더구나.

그래서 나도 일러주었지.

‘그럼, 그럼!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점심 시간이 다 끝나가는 자투리 시간에 생각하기에는 아깝고 말고.

그러니 밥먹고 와서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자’라고 덧붙였더니,

하하 그 인간 녀석, 벌써 문을 열고 식당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더라


그가 밖으로 나가고, 이미 승리는 내 쪽으로 기울고 있더라.

나는 그에게 신문과 73번 버스를 보여 주었지.

신문은 우리의 아주 훌륭한 조력자야.

세상의 온갖 자극적인 뉴스들로-누가 싸웠는지, 어떤 사고가 났는지,

연예계의 가십거리 등등으로

머릿속이 소음으로 가득 차면, 정작 중요한 질문은 잊혀지고 만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도 놓치지 마라.

엔진의 덜컹거리는 진동, 옆 사람의 땀 냄새,

그리고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광고 간판들에 집착하게 해라.

“지금 이 순간, 이 좁은 버스 안의 현실이 전부야”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 의심할 여유를 주지 마라.


가끔 그가 아름다운 노을을 보며

숭고하고 경이로운 감정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럴 땐 당황하지 말고 아주 사소한 불편함을 떠올리게 해라

“아, 내일 출근하기 정말 싫다” 라거나

“구두 속에 모래가 들어갔나?” 와 같은 생각 말이다.

숭고함과 경이로움은 아주 작은 짜증 앞에서도 쉽게 무너지는 법이니까.


웜우드야, 인간들은 자신들이 ‘실제의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한다.

우리가 만들어낸 감각의 감옥 속에 갇혀 있으면서 말이지.

그들이 신문과 점심 메뉴와 버스 시간표에 매몰되어 있는 한, 우리는 안전하다.


환자들을 끊임없이 바쁘게 만들고, 끊임없이 자극해라.


만약 그가 책을 읽으려 한다면, 가장 난해하고 어려운 책을 권해라

지적인 허영심에 빠져 단어 하나 하나를 분석하게 만들어라.

책 속에 담긴 진리를 가슴으로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

오직 머리로만 계산하게 하고, 곧 지쳐서 잠들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전략이다.


자, 이제 가서 네 환자를 다시 ‘현실’로 불러 들여라

그가 깊은 생각에서 깨어나

다시 신문을 펼치고 점심 메뉴를 고민하게 만들어라.


명심해라 환자가 “생각하게 하지 마라, 그저 감각하게 해라”

이것이 네가 완수해야 할 숙제다.


너를 아끼는 삼촌, 스크루테이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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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수 : 악마는 신(하나님)을 '원수'라고 칭해요.

본인들이 인간들을 지옥으로 데려가야 하는데, 방해를 하니까.


* 환자 : 악마들은 신앙을 바이러스처럼 전염성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교회에 다닌다거나 기도하는 인간을 환자라고 말하지요.

악마는 유혹하려는 인간들을 타겟으로 삼고

언제나 지옥으로 데려가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고 합니다. 어이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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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인정하는지'에 따라 유물론과 기독교는 대립합니다.

유물론은 마음, 정신, 영혼조차도 뇌의 화학 작용이나 물질의 부산물일 뿐이라고 봅니다.

초월적인 신(God)이나 사후 세계를 부정합니다.

오직 과학적으로 검증 가능하고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만이 '실재(Real)'라고 믿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을 ’실재‘라고 말하며 이에 집중하라’고 합니다.


반면에 기독교는 독특합니다.

예수는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타난 신입니다.

물질, 이성, 지혜를 긍정하면서 동시에 숭배하지는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도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조카이자 신참 악마인 웜우드에게 노련한 악마인 스크루테이프는

인간에게 유물론을 진리라고 애써 가르칠 필요도 없다, 라며

그저 인간이 눈앞의 일상(점심, 버스, 신문)에 정신이 팔려 아무 생각 없이 살게 만드는 것,

그것이 너의 진짜 임무다! 라고 말합니다.


악마는 인간이 "나는 유물론이 옳다고 100% 확신해!"라며

고민하는 것조차 싫어합니다. 고민 끝에 마음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요.

대신 "아 몰랑, ‘죄, 죽음, 영원’ 같은 골치 아픈 생각은 집어치우고

맛있는 거 먹고 재밌는 영상이나 실컷 보자"라는 태도를 갖게 하는 것이

악마에게는 승리의 지름길입니다.


한편, 개인적으로 일상생활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 이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과 대화할 때 유독 불편함을 느낍니다.

말로 직접 하지 않아도, 머릿속에 ‘비교.판단.평가’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나도 모르게

내가 상대방을 향해서든

반대로 상대방이 나를 향해서든

누군가가 이미 비교,판단,평가를 하고 있기에

비록 '말'이라는 것을 통하지 않고서도

(귀로 직접적으로 들리고, 보이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이 서로에게 고스란히 전달 된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쩌면 매일 만나는 ‘A’라는 사람이 내 눈에는 매끈한 호박으로 보이나,

누군가의 눈에는 울퉁불퉁한 호박으로 보일 수도 있구나. 라고요.

그래서 끼리끼리 친구가 될 수도 있는 거구나를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으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