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제르 Aug 27. 2023

내일의 얼음 얼려두기

매일 다시 채우는 생활

  무더운 여름 오후. 아이스커피 한 잔이면 나른한 피로가 싹 가실 텐데 올여름은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덥거나 우산이 제 역할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비바람이 부는 날들의 연속이다. 아이스커피 한 잔 '외주' 주기가 쉽지 않다.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가는 코앞 카페도 도달하기 힘든 돌봄 노동인들은 집에 갇혀 아이스커피를 직접 내려(혹은 타서) 마신다. 


  얼음이 나오는 신박한 정수기도 많지만 우리 집 정수기는 아직이다. 어제의 착실했던 내가 얼려둔 얼음이 담긴 얼음틀을 꺼내 식탁에 탕탕 내리쳐 우유 속에 담는다. 탕탕. 식탁에 부러 조심성 없이 내리칠 때마다 아이들에게는 미처 드러내지 못했던 울화를 뿜어낸다. 하던 놀이를 흠칫 멈추고 돌아보면 마음을 들킨 게 미안하기라도 할 텐데 신경도 안 쓰고 노는 아이들의 뒷모습이 얄밉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순수한 아이들이 나에게 일부러 이럴 리 없어.' 생각이 들어 작은 등 어깨들이 측은해지기도 한다. 


  우유와 얼음을 넣은 컵을 커피 머신에 올린 후 에스프레소 샷을 내린다. '우웅-' 기계 소리에 작은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샷 내려오는 모습을 구경한다. 뜨거운 에스프레소 샷이 얼음을 쏘고 내려올 때면 하루동안 냉동실 속에서 꽝꽝 얼었던 얼음도 속절없이 녹아 버린다. 아이는 샷 내려오는 모습을, 나는 단단한 얼음 위에 꽂히는 샷을 응시한다. 이렇게 하면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 카페 라테 완성. 아이스커피를 마실 때마다 감사해 마지않는 인물은 다름 아닌 '어제의 나'이다. 정신없고 귀찮았을 텐데 얼음틀에 물을 채워 얼려 놓았던 성실한 어제의 나. 매일 쓰고 어떤 날엔 한 통의 얼음을 모두 소진해 버리기도 하지만, 언제든 약간의 시간을 내어 새로운 물을 채워 넣어두는 착실한 나. 


  냉동실 속에서 꾸준한 시간이 흘러야만 얻을 수 있는 얼음은 필요하다고 해서 당장에 얻어낼 수도 없는 결실과도 같은 것이다. 어제 열두 시간을 얼리고 오늘 한 시간을 얼린다고 어제의 수고가 오늘의 시간으로 '소급 적용'되는 것도 아닐 터. 그렇기 때문에 매일 쓴 만큼 다시 채우는 소소하지만 적당한 수고가 필요한 것이다. 피곤할 때마다 내려 마시는 커피 한 잔에 필요한 얼음 대여섯 개, 하루에 서너 잔이면 완전히 소진되어 버리는 스무 칸의 얼음. 그러나 쓴 만큼 깨끗한 정수물로 채워 넣고 쓰고 또 채워 넣고 하는 단순한 노동을 반복하다 보면 매일 언제든 얼음을 얻어낼 수 있는 얼음정수기가 부럽지 않다. 사실 얼음정수기조차 끊임없이 얼음을 뽑아내지는 못하거니와.


  스무 칸짜리 하얀 플라스틱 얼음틀에서 내 마음틀을 본다. 마음틀의 에너지를 다 쓸 때까지 다시 채우는 과정이 없다면 그 어떤 급속 냉동 시스템도 나의 마음틀을 채워줄 수는 없을 것이다. 내 마음을 채우는 데는 분명 성실하게 돌아보고 돌보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느 날에는 더 많은 에너지(얼음)가 필요할 수도 있다. 적은 에너지(얼음)가 필요한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라도, 내 마음틀을 채울 이는 나 자신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내일의 나를 위해 지금, 나의 마음틀을 꺼내어 열어보고 깨끗한 물로 채워 넣어보자. 오늘의 소진된 마음틀은 적어도 오늘 밤에는 해결해야 내일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걱정 없이 마실 수 있을 테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울이라는 물 밖으로 나온 이가 배워야 할 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