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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제르 Aug 29. 2023

케케묵은 요리 재료로 뭘 할 수 있어요?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두려운 이들에게

  "전에 다닌 직장에서 실패했던 기억이 자꾸 나요. 이번에도 그렇게 될 것 같고 어차피 그렇게 될 거라면 그냥 시작을 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요."


  한 직장에 오래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면 모든 사람들이 '퇴사'를 한번 이상 경험한다. 적성과 흥미에 맞지 않았을 수도 있고 처우나 복지가 내 생각과 맞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나의 실수였든, 나의 잘못이었든 그것도 아니라면 직장 상사의 잘못이었을지도 모른다. 대표나 사장의 잘못이었을 수도 있고. 모든 기억이 좋았던 전 연인이 없듯 모든 것이 다 좋았지만 나만 못했던 전 직장도 없다. 


  나의 내담자 상현 씨(가명)도 그렇게 퇴사를 경험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실수도 있었겠지만 직장에서 약속을 지켜주지 않았거나, 엉터리 계약서를 내밀기도 했다. 한 직장에서 오래 다닌 기억이 없지만 하필 거쳐갔던 직장들이 죄다 크고 작은 문제들이 있는 곳이었다. 직장을 잘못 선택한 상현 씨도 잘못이라면 잘못이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의 잘못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상현 씨의 잘못만은 아니었잖아요. 첫 번째 회사는 계약서도 쓰지 않는 곳이었고 두 번째 회사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죠. 이번에 하게 될 일에 대해 생각해 볼 때, 어떤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으세요?" 


  "저한테 말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할까 봐 걱정이 들고요. 더 유능한 사람이 들어오면 근무시간을 바꾸라고 할 것 같아요. 여기가 커지면 저를 버릴 것 같고요." 


  "첫째, 더 많은 것을 요구할까 봐 걱정이 된다면 계약서에 그런 내용을 명시해서 써넣으시면 되죠. 상현 씨가 일했던 10년 전에 비하면 법이 많이 좋아진 편이에요. 지킬 수밖에 없죠. 둘째, 더 유능한 사람이 들어오면 근무 시간을 바꿔야 할 것 같나요?(상현 씨는 프리랜서이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되나요? 상현 씨가 정한 그 시간을 바꾸면 안 될만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사실 계약하는 곳의 입장에서도 경력이 더 많은 사람이 들어온다면 그 사람이 요구한, 그 사람에게 더 유리한 시간을 주고 싶을 것 같긴 한데요. 그리고 그렇게 되기 전에 상현 씨가 먼저 계약하고 시작하면 되겠죠. 셋째, 회사의 규모가 커지거나 유명해진다면 상현 씨를 버릴 수도 있겠다고요? 회사의 규모가 커지는 동안 상현 씨는 어떨 것 같나요? 상현 씨도 커질 거예요. 지금은 관련 경력도 경험도 없지만 그곳에서 경력을 쌓아나갈 수 있겠죠. 그러는 동안 돈도 벌 수 있을 것이고요."


  어떤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소위 fight or flight(투쟁도피반응: 교감신경계가 작용하여 생긴 에너지를 소비해서, 긴급 상황시 빠른 방어 행동 또는 문제 해결 반응을 보이기 위한 흥분된 생리적 상태. 출처 [네이버 영어사전]) 의 행동을 취하고 혹시나 겪을지 모르는 문제에 미리 대처하는 것도 중요하다. 다만 그것은 그 일을 시작했을 때여야 한다. 두려움과 걱정, 불안으로 인해 그 일을 시작조차 못하는 것은 투쟁도피반응이라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걱정되는 부분이 있다면 인지적으로 수정하고 걱정거리, 고민거리, 나의 시작을 가로막는 수많은 질문과 의심들을 하나씩 소거해 가면서 일단 시작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그렇죠.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 다 맞는 말씀 같아요. 그런데 시작하려다가도 자꾸만 그 생각으로 되돌아오는걸요."


  "상현 씨, 자전거 탈 줄 아세요? 멈춰 있던 자전거로 과속방지턱을 넘을 때 어때요? 살짝 올라서면 뒤로 밀려 내려오고 또 올라서다 밀리면 도로 내려오고 그렇죠. 되돌아보면 큰 턱도 아닐 작은 과속방지턱 하나를 넘어설 힘을 못 내고 있는 상황이에요. 과거의 상처와 걱정, 두려움 때문에요. 상현 씨가 저와 이야기하는 시간 동안 제가 턱을 하나씩 만날 때마다 상현 씨의 등을 힘주어 밀어드릴 거예요. 그렇게 한 번 두 번 턱을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속도가 붙어서 점점 제 도움이 없이도 스스로 운전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상현 씨도 알고 있다. 어릴 적의 상처를 끄집어내서, 이제 와서 그 케케묵은 요리재료를 가지고 요리해 봤자 결국은 썩은 음식일 거라는 사실을. 아무리 맛나게 요리한다고 해도 썩은 재료로 만든 그것은 지금 먹을 수도 없다. 지금 중요한 것은 새로운 재료로 다만 십몇 년의 세월 동안 상처받으며 혹은 위로받기도 하며 쌓인 나만의 레시피(경험)로 새로운 요리를 해보는 것이다. 


  이번 한 주 동안 상현 씨의 숙제는 지금 '선택 가능한 일'이자 '지속 가능한 일'을 찾아 계획해 보는 것이다. 일을 하고 싶다면 집에 틀어박혀 공부하고 스펙만 쌓을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조건에 맞는 일자리를 찾고 이력서를 보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케케묵은 요리재료를 떠올린다면 그 당시에 했던 실수들, 고치고 싶은 버릇이 있다면 안 좋은 습관 고치기 그 자체가 계획이 될 수도 있다. 나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오랜 심각한 우울증 때문이라면 우울증에 대한 치료를 받는 것도 계획이 될 수 있겠다. 계획하고 실행하는 이 모든 단계들이 말처럼 쉬운 것만은 아니다. 기본적인 체력과 힘이 있어야 하고 도움을 주고 밀어주고 당겨주는 역할을 해줄 만한 전문가가 필요할 수도 있다. 


  다만 내가 오늘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다. 


  "이미 오래되어 썩어버린 그 재료를 붙들고 있지 마세요. 그 재료로 냉장고(마음) 안에 있는 다른 재료들까지 썩게 만들지 마세요. 과감히 버리고 비워서 새롭고 신선한 재료로 채워 보세요. 시작이 힘들다면 등을 떠밀어 드릴게요. 오르락내리락 작은 턱을 넘어서면서, 새로운 요리를 과감히 시도하면서 결국에는 혼자의 힘으로도 맛난 요리를 해 먹을 수 있을 거예요." 


© hngstrm,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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