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피형 남자친구 괴롭히기
회피형끼리의 연애에 장점이 있다면 진심을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서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장점이 장점으로 제대로 작동하려면, 최소한 서로의 진심을 그대로 말하고 행동으로 보여주려는 노력을 꾸준히 이어가야 한다. 회피형은 아무리 주체적이고 안정적으로 보인들 결국 불안정 애착유형이기 때문에, 관계 구성원이 둘 다 불안정한 회피형끼리의 연애에서 이런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건 정말 어렵다. 일단 서로 끌려야 하고, 어떤 이유에서든 그 끌림을 직면하기로 결심해야 하며, 쉽게 무너지기 쉬운 결심에 끝까지 불씨를 당겨야 하고, 눈치보며 재지 않고 진심을 표현해야 한다. 그리고 저 모든 것이 다 쉽게 되면 애초에 회피형도 아니다.
여느 날이나 다를 것 없는 어떤 날이었다. 예랑이가 늘 그랬듯이 퇴근하며 전화를 했다. 매일 그러듯이 아무 것도 아닌 주제로 잠깐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 내가 정말 갑자기 물었다.
"근데, 너 나랑 결혼 할거야?"
"응? 응!"
지금 아무리 열심히 궁리를 해 봐도 그 질문에 앞서서 무슨 이야기를 했었는지 기억이 전혀 안 날 만큼 예고 없이 튀어나온 뾰족한 질문이었다. 갑자기 그런 질문에 대답해야했던 회피형 인간만큼 놀라진 않았겠지만, 예상치못한 그의 즉답을 듣고 나도 많이 놀랐다. 결과적으로는 긍정적인 답을 하더라도 중간에 최소 한 번은 '글쎄' 내지는 '아직' 정도를 말할 줄 알았는데, 되려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듯한 말투때문에 내 말문이 턱 하고 막혀버렸다. 그래서 잠깐 아무도 말을 하지 않다가, 그가 무슨 말인지 더 이어서 말했다.
어쩌면 물어보는 내 마음에도 그의 대답 속에 있었던 것과 같은 종류의 확신이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 확신이 매일 들어도 반가운 그의 목소리를 듣다보니 불쑥 고개를 들고 뛰쳐나와, 평생을 회피형이었던 사람에게 정면으로 부딪혀버렸다. 아니 뭐 물론 진심을 정면으로 부딪히는 말은 "나랑 결혼하자!"겠지. 하지만 자신의 본심을 숨기는데 익숙한 내게 속이 빤히 보이는 "너 나랑 결혼 할거야?"정도면 덤프트럭 정도는 된다.
"결혼하는 건 당연하고, 내가 준비가 더 되어야지. 돈도 좀 더 모으고..."
그 다음 이어진 예랑이의 말은 구체적인 계획이었다. 응. 응. 하고 대답하며 멍하니 듣기만 해도 앞으로의 그림이 그려지는 느낌이 들 만큼 상세했다. 신혼집을 어디쯤 구하는게 출퇴근 시간도 적당하고 예산도 적당할지, 그 예산을 맞출 만큼 저축이 모이려면 앞으로 시간이 몇 개월 정도 필요한지. 우리끼리 반은 장난으로 결혼에 대한 망상을 나누던 수준이 아니었다.
그에게 저렇게까지 큰 질문에 전조도 없이 직면시킨 걸 지금은 아주 조금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또 어마어마하게 송구스럽진 않다. 이렇게 강한 확신을 품는 건 회피형인 우리에게 잘 발생하지 않는 일이고, 그래서 이 확신을 다루는 게 익숙치 않다. 매일 매일 자고 일어나도 닳지 않고 오히려 선명하게 빛을 발하는 마음이 신기하다. 그래서 내가 묻지 않았으면 어차피 그가 물었을 것이다. 너 나랑 결혼 할 거냐고. 그리고 아마 나도 똑같이 대답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