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믕됴 Jun 13. 2023

"너 나랑 결혼 할거야?"

회피형 남자친구 괴롭히기



  회피형끼리의 연애에 장점이 있다면 진심을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서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장점이 장점으로 제대로 작동하려면, 최소한 서로의 진심을 그대로 말하고 행동으로 보여주려는 노력을 꾸준히 이어가야 한다. 회피형은 아무리 주체적이고 안정적으로 보인들 결국 불안정 애착유형이기 때문에, 관계 구성원이 둘 다 불안정한 회피형끼리의 연애에서 이런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건 정말 어렵다. 일단 서로 끌려야 하고, 어떤 이유에서든 그 끌림을 직면하기로 결심해야 하며, 쉽게 무너지기 쉬운 결심에 끝까지 불씨를 당겨야 하고, 눈치보며 재지 않고 진심을 표현해야 한다. 그리고 저 모든 것이 다 쉽게 되면 애초에 회피형도 아니다.


  여느 날이나 다를 것 없는 어떤 날이었다. 예랑이가 늘 그랬듯이 퇴근하며 전화를 했다. 매일 그러듯이 아무 것도 아닌 주제로 잠깐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 내가 정말 갑자기 물었다.


  "근데, 너 나랑 결혼 할거야?"

  "응? 응!"


  지금 아무리 열심히 궁리를 해 봐도 그 질문에 앞서서 무슨 이야기를 했었는지 기억이 전혀 안 날 만큼 예고 없이 튀어나온 뾰족한 질문이었다. 갑자기 그런 질문에 대답해야했던 회피형 인간만큼 놀라진 않았겠지만, 예상치못한 그의 즉답을 듣고 나도 많이 놀랐다. 결과적으로는 긍정적인 답을 하더라도 중간에 최소 한 번은 '글쎄' 내지는 '아직' 정도를 말할 줄 알았는데, 되려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듯한 말투때문에 내 말문이 턱 하고 막혀버렸다. 그래서 잠깐 아무도 말을 하지 않다가, 그가 무슨 말인지 더 이어서 말했다.


  



  어쩌면 물어보는 내 마음에도 그의 대답 속에 있었던 것과 같은 종류의 확신이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 확신이 매일 들어도 반가운 그의 목소리를 듣다보니 불쑥 고개를 들고 뛰쳐나와, 평생을 회피형이었던 사람에게 정면으로 부딪혀버렸다. 아니 뭐 물론 진심을 정면으로 부딪히는 말은 "나랑 결혼하자!"겠지. 하지만 자신의 본심을 숨기는데 익숙한 내게 속이 빤히 보이는 "너 나랑 결혼 할거야?"정도면 덤프트럭 정도는 된다.


  "결혼하는 건 당연하고, 내가 준비가 더 되어야지. 돈도 좀 더 모으고..."


  그 다음 이어진 예랑이의 말은 구체적인 계획이었다. 응. 응. 하고 대답하며 멍하니 듣기만 해도 앞으로의 그림이 그려지는 느낌이 들 만큼 상세했다. 신혼집을 어디쯤 구하는게 출퇴근 시간도 적당하고 예산도 적당할지, 그 예산을 맞출 만큼 저축이 모이려면 앞으로 시간이 몇 개월 정도 필요한지. 우리끼리 반은 장난으로 결혼에 대한 망상을 나누던 수준이 아니었다.


 




  그에게 저렇게까지 큰 질문에 전조도 없이 직면시킨 걸 지금은 아주 조금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또 어마어마하게 송구스럽진 않다. 이렇게 강한 확신을 품는 건 회피형인 우리에게 잘 발생하지 않는 일이고, 그래서 이 확신을 다루는 게 익숙치 않다. 매일 매일 자고 일어나도 닳지 않고 오히려 선명하게 빛을 발하는 마음이 신기하다. 그래서 내가 묻지 않았으면 어차피 그가 물었을 것이다. 너 나랑 결혼 할 거냐고. 그리고 아마 나도 똑같이 대답했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회피형끼리 500일 째 연애중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