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환자 가족이 되었습니다.
* 아빠는 2023년 5월 '변연부 B세포 림프종 / MALT Lymphoma'(혈액암/림프종/임파선암)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 PC에서 작성되었습니다.
암 판정을 받고 이튿날, 골수 검사가 있었다. 척추 아래쪽에서 골수를 빼내어 전이 여부를 확인하는 검사였다. 1층 안내 데스크에서 휠체어를 빌려다가 조혈모세포 검사실로 향했다.
검사 후에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말라고 해서 엄마와 함께 갔다. 한 시간 정도 기다렸던 것 같다. 검사가 끝나고 검사실에서 보호자를 불러 휠체어와 복대를 간호사 선생님께 전했다. 아빠는 휠체어를 타고 나오셨다.
하루종일 누워 있으라고 했다. 지혈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점심을 드시고부터는 거실 소파에 누우셨다. 평일 낮시간엔 볼 게 없는데, 라며 리모컨을 드시길래 넷플릭스를 켜서 <더 글로리>를 틀어드렸다. 이전부터 계속 유튜브 같은 곳에서 짤막한 영상을 보시곤 궁금해하시는 것 같았다. 아마 어떻게 보는지도 모르시고, 지금까지는 보실 시간도 없으셨으니 그 정도에 만족하셨던 모양이다.
'동은오적'이 어떻게 몰락하는지가 궁금하다고 하셔서 2부인 9화부터 틀어드렸다. 중간중간 흐름이 빠르거나 1부에 나왔던 내용이라 아빠가 잘 따라가지 못하시는 부분은 내가 옆에서 알려드렸다. 그러느라 나도 하루종일 TV 앞에 잡혀 있었다. 저녁 먹을 때만 잠깐 쉬고 밤까지 내리 연속으로 끝까지 보았다.
또 이틀 후에는 전신 뼈 촬영이 있었다. 역시나 전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예전 PET-CT 같이 시간이 오래 걸리고 복잡할 거라 생각했는데 너무나 간단했다. 손등에 주사 하나 놓고서 시간 맞춰 다시 오라고 하셨다. 금식인 줄 알고 아침도 안 먹은 터라 일단 아침을 먹었다.
뼈 촬영은 금방이었다. 그리고 집에 가니 1시쯤이라 점심을 먹고 다시 시작된 <더 글로리>. 이번에는 1화 건너뛰고 2화부터 보았다. 1화에는 어린 동은이가 괴롭힘 당하는 장면이 많아 보기에 좀 불편했었기에 2화부터 보시길 추천했다.
할 일이 많았다. 원래 6월에 논문 심사를 받고 석사 졸업을 하려고 계획했었다. 그래서 4, 5월에는 정말 바쁠 예정이었다. 하지만 졸업은 12월로 미뤘다. 왜냐면 이런 날 때문이다. 아빠의 암을 핑계 삼고 싶은 게 아니다. 함께 병원을 다녀오느라 반나절을 아무것도 못했으니 오후에 카페라도 나가서 글을 좀 봐야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함께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저 나쁜 년, 이라며 함께 연진이를 욕했다. 나는 그런 시간에, 아빠의 암을 원망하기도 싫고, 공부해야 하는데 라는 죄책감을 갖기도 싫었다. 나는 아빠와 보내는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온전히 소중함만 느끼고 싶었다. 마음이 복잡한 게 싫다.
지금 이 순간에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물론 아빠가 이런 내 마음을 듣는다면, 아빠는 아빠고 너는 너니 너의 시간을 보내고 너의 공부를 해라, 라고 하실 거란 것도 잘 안다. 당연히 맞는 말이고.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조금 늦는 길을 택했다. 엄마와 아빠 앞에서 웃으며, 까딱하면 무거워질 집안의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풀면서, 지금은 양손에 두 분의 손을 잡고 느리게 가는 길을 택했다. 혼자 가는 길은 나중에 찾아갈게요.
그다음 주 어버이날, 외과 외래 진료가 있었다. 수술 상처가 잘 아무는지 확인하는 날이었다. 외과 선생님은 앞으로 잘 치료받으시라고 배웅해 주셨다. 아빠는 고향 친구들 모임이 있어 지방으로 가셨다.
나는 대학 시절 친구 ㅅ을 만나 술을 마셨다. 여기에 ㄱ까지 우리 셋은 소위 '술꾼 도시 여자들'이었다. ㅅ과 ㄱ에게 아빠 암 소식을 알리자 둘 다 위로하는 말을 해 줬는데, 특히 ㄱ이 따뜻한 말들을 해 줬다. 나보고 아버지 엄니 손 한 번 더 잡아드리고, 내 손은 자기가 잡아준다며, 언니가 나름 선배라며... 몇 년 전, ㄱ의 어머니가 갑상선암 수술을 하셨다. 집이 지방이라 서울에 자취하는 딸 ㄱ의 집에 자주 왔다 갔다 하셨고 ㄱ도 어머니의 간병을 했었다. 그때는, 나는 아무것도 못해줬다. 그게 참 미안하고 또 고맙다.
가족이 암에 걸렸지만, 주위의 소중함 덕분에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