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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나동 Oct 05. 2023

흰머리가 어때서

외국에서 고작 1년 살다가 오긴 했지만 한국 와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있다.


"머리가 왜 그렇게 하얘졌습니까?"

"머리가 하얗게 다 세었네요?"


여기서 머리는 사람 목 위 부분이 아닌 머리카락의 준말이다.

물론 4~5년 전부터 흰머리가 늘기 시작해 어느 순간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졌다.

초기에는 거울을 보고 흰머리를 뽑느라 눈이 돌아갈 뻔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흰머리를 뽑는 빈도와 횟수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머리가 하얘지기 때문에 포기하게 됐다.

비록 검정이 아닐지라도 그 한 올 한 올이 얼마나 소중한 터럭이었는지 그땐 미처 깨닫지 못했다.

해가 다르게 숱이 적어지는 머리를 보며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흰머리는 결코 뽑는 게 아니다.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낙하할 때까지 애지중지해야 할 대상이다.

그러고 보면 늙음 역시 거의 모든 스포츠처럼 중력을 얼마나 이겨내느냐의 싸움인 것 같다.

나의 머리카락들이여, 깊이 뿌리를 내리고 부디 중력을 이겨내 주오.


정말 거짓말 좀 보태서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마다 내 머리를 보곤 그 말부터 시작했다.

첨엔 뭐라 할 말이 없어 얼버무리고 말았는데 하도 많이 듣다 보니 답변까지 생각해두고 있다.

난들 뭐 머리가 하얘지고 싶었겠나.

나이 들고 남들보다 새치 유전자가 많아서 그런 걸 우짜라고.

그런데 자꾸 그런 말을 듣다 보니 흰머리가 이상한 건가 생각하게 됐다.

검은 게 정상이고 흰 게 비정상인가 하는 생각에 이르기도 했다.

검은 들 흰 들 뭐가 문제란 말인가,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처럼 본연의 역할만 잘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아내 역시 지난 1년간 스웨덴에서 고생해서인지 없던 새치가 생겼다.

새치는 초기 몇 가닥이 가장 눈에 거슬리고 보기 싫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나처럼 만나는 사람마다 비슷한 말을 들은 아내는 그 말에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결국 염색해 버렸다.

여러 사람들의 '머리가 어째 그렇게 됐습니까'라는 말들에도 난 꿋꿋이 거의 반백이 돼버린 머리를 고수하고 있다.

염색은 내 지조를 버리는 것이라는 개똥 신념을 가진 채로 말이다.


지난 1년간 스웨덴에서 익숙해지지 않았던 버릇 혹은 습관 중 하나가 '사람 안 쳐다보기'였다.

처음엔 낯선 나라, 새로운 사람들이 신기해서 여기저기 돌아보고 살펴봤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 중 하나가 사람 구경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대놓고 본 건 아니었지만 현지인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우리랑 어떤 차이가 있을까 호기심 반 신기함 반이었다.

그러다가 느낀 건 사람은 다 똑같다는 단순한 진리였다.

머리 스타일, 옷 입는 방식 등이 달라도 결국은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주머니와 소매가 닳아 해진 피엘라벤 그린란드 재킷을 입은 사람이나 광택 나는 몽클레어 신상 재킷을 걸친 이들이나 별반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명품을 입었다고 사람이 명품이 아니듯 후줄근한 옷을 입었다고 그 사람의 삶이 후줄근한 건 아닐 테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후 주변 사람을 덜 의식하고 덜 쳐다보게 됐다.

나 혼자만의 생각, 시선, 걸음에 신경 쓰려고 했다.

스웨덴에서는 그냥 자신만 바라보면 됐다.

물론 개인주의 성향의 스웨덴 사람들이라도 도움을 요청하면 대개 친절하게 응대해 줬다.


스웨덴 마라톤 대회에서 겪었던 일화도 기억난다.

명색이 마라톤 대회인데 별도의 탈의실이 없었다.

사실 있긴 했다. 멀어서 그렇지.

특히 대회가 끝난 뒤 완주한 사람들이 불과 몇 m 앞에서 바지를 훌렁훌렁 벗고 갈아입는데 아빠 응원 나온 감수성 뿜뿜 초6 첫째 딸이 기겁하며 얼굴을 돌렸다.

따지고 보면 인간은 누구나 똑같지 않나.

문화 차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걸 감추려 하고 이상하다고 여기게 만드는 사회가 오히려 이상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스웨덴에서 수유실을 좀처럼 보기 힘든 이유도 비슷하리라 생각했다.

쇼핑몰 의자에서, 유니바켄 나무의자에서, 거리 벤치에서 스웨덴 여성들은 아이에게 당당하게 모유수유를 했다.

그 모습에 처음엔 약간 당황했다. 하지만 그걸 의식하는 내 모습이 비정상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부산 해운대구 센텀시티의 한 아파트에서는 쓰레기봉투를 버리러 나올 때 명품 옷에 명품 신발을 신은 사람이 더러 있다는 회사 선배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건 단지 취향의 문제일 수 있지만 누군가는 쓰레기 버리러 가는 동안에도 타인이 내가 걸친 옷을 알아주기 바라는 심리가 작용하지 않았을까.

명품의 가치는 희소성에 있고 가격 때문에 쉽게 가질 수 없는 걸 소유했다는 자부심이 작용할 때 더욱 빛나는 것이기에.

스웨덴에서 돌아오고 나서 생필품 등 가급적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사지 않고 있다.

특히 옷은 하나도 사지 않고 기존에 있던 걸 부지런히 입고 있다.

이제 겨우 한 달이지만 가급적 옷을 사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더불어 중력을 이기고 버티는 연습도 하는 중이다. 달리기도 하고 턱걸이도 하고 뭐 그렇게...

옷이 나에게 어울릴 수 있도록. 내 몸에 입혀진 옷이 더 빛날 수 있도록.


스웨덴에서도 일개 동양인일 뿐인 나의 발끝에서 머리까지 빤히 쳐다보는 현지인이 있긴 했다.

그 노골적인 시선에 매우 기분 나빠 나 역시 빤히 쳐다보다가 눈싸움에 져서 결국 시선을 돌렸다.

한국에 돌아온 지 며칠 안 됐을 때 아침 산책을 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도 불쾌한 일을 당했다.

한 중년 남성이 나와 아내를 번갈아 훑어보는데 참 기분이 나빴다.

지나가는 사람이 궁금해서 쳐다볼 수 있지만 왜 꼭 그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쳐다봐야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편으론 서로를 믿지 못하는 사회, 내 가족이 아니면 믿을 수 없는 세상이라서 사람들을 그렇게 쳐다보는 것일까.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잠재적인 경쟁자, 적이 될 수 있다는 불안, 의심 때문인가.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부터 경쟁하는 법부터 배우는 우리 교육은 문제 푸는 기계를 양산하고 공부 잘하면 최고라는 인식을 아이들에게 심어주는 것 같다.

최근 서울의 잘 나가는 학원과 강사들이 수능 문제 출제 교사들로부터 돈을 받고 기출문제를 사서 다시 고액의 학원료를 받고 파는 커넥션이 드러났다.

이번 사건은 어쩌면 현행 입시제도의 근간을 뒤흔들 만큼 중대한 비리였다.

난 이 문제가 교육부장관은 물론 대통령까지 국민에게 석고대죄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공정한 룰을 만들겠다고 다짐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뉴스에 가장 분노해야 할 학부모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교육부로, 학원으로 몰려가 항의라도 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예상보다 조용했다.

학부모들은 이번 수사로 기출문제를 산 소위 일타강사나 유명 학원의 족집게 특강을 자녀들이 더는 못 듣게 될까 봐 우려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런 세계가 있는 줄 몰랐던 정보력 부재를 한탄하며 자녀에게 미안해하고 뒤늦게 후회했는지도 모르겠다.

편법이 판치고 돈으로 교육을 사는 미친 세상이다.

아니 그게 당연한 세상이다.


최근 전국적으로 살인예고가 유행처럼 퍼져 밖에 돌아다니기가 무서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언제 어디서 해코지당할지 모르는 사회에서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사람을 믿지 못하니까 일단 의심하고 경계해야 한다.

아이러니다.

사람에 대한 신뢰가 없기에 사람을 예의주시하게 되고 쳐다보게 만드는 이 지독한 불신의 사회.


한국은 기본적으로 남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회다.

그것도 대체로 칭찬보다는 안 좋은 이야기가 다수다.

치열한 경쟁사회의 부작용인가.

비교하면 사실 나만 불행해지는데 다른 사람 신경 쓰기보다 나 자신, 내 가족에게 집중하기에도 짧은 인생이다.

좋지 않은 감정은 나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돌아보면 나도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외모나 옷을 소재로 대화를 시작해 왔던 것 같다.

이제 다른 말을 고민해 봐야겠다.

찾아보면 할 말이 그렇게 없는 것도 아닐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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