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아가씨 마트 갈 거야? 그럼 가는 김에 우리 과일도 좀 사다 줘. 우리가 과일을 너무 좋아하거든. 고마워~ 오홍홍~.”
내가 가이드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아줌마 팀에서 훅 치고 들어온 말이 내 발을 잡았다.
‘오늘 하루 같이 다녔다고 벌써 나를 편하게 생각하는 거야? 아님 내가 어려 보여서 만만한 건가?’
웃으면서 반말하는 아줌마가 살짝 얄미웠지만,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해 내 손에 쥐어주는 지폐를 받아 들었다.
가이드의 오토바이는 작은 스쿠터였다. ‘야! 타!’ 하는 그런 오토바이를 타게 될까 봐 살짝 무서웠는데, 귀여운 사이즈를 보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나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한 가지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건 바로 내가 입고 있는 긴 원피스였다. 발리 여행용으로 구입한 하늘하늘한 원피스는, 예쁜 사진을 건지기 위한 필수품이다. 여행사진을 남기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기에, 원피스를 종류별로 여러 벌 챙겨 왔다. 그중 오늘 입은 건 내가 챙겨 온 원피스 중에서 가장 긴 원피스였다.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려면 자연스럽게 다리를 ‘쩍벌’ 할 수밖에 없는데, 이 발목까지 내려오는 원피스를 입고서는 불가능했다.
그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그건 바로 청춘영화의 여주인공처럼 두 다리를 다소곳이 모으고 옆으로 앉는 방법이었다. 그래. 남주인공의 자전거 뒷자리에 교복 입은 여주인공이 타면 다 이렇게 앉더라.
“저... 치마가 길어서... 옆으로 앉아도 되죠?”
“아, 네.”
하지만, 오토바이 뒷자리에 어정쩡하게 엉덩이를 걸쳐 놓고는 또 고민에 빠졌다. 옆으로 앉으려니 손으로 잡을 곳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이 각도에서는 가이드의 허리를 잡기도 쉽지 않았다. 제대로 잡지 못했다간 긴 원피스 자락을 휘날리며 길바닥에 구르게 될 것이다. 다치는 건 둘째고, 그런 창피한 장면은 절대 연출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한 손은 가이드의 허리(... 근처의 옷자락)를 잡고, 반대쪽 손은 내가 앉은 의자 귀퉁이를 잡았다.
드디어 오토바이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처음에 약간 비틀거리던 오토바이가(나 때문은 아니라고 믿는다.) 차선 없는 도로에 진입하고는 안정감 있게 달리기 시작했다. 비포장 도로가 많다 보니 승차감은 포기해야 했다. 흙먼지가 섞였음에도 상쾌하기만 했던 바람 덕분에, 난 엉덩이 통증을 조금이나마 덜 느낄 수 있었다.
‘아, 시원하다.’
덥고 습한 밤공기와 흙먼지를 품고 불어오는 바람이 이렇게 낭만적일 줄이야. 덜컹거리는 오토바이를 운전하고 있는 현지 청년과, 원피스를 흩날리며 뒷자리에 앉아 있는 이방인 소녀(키 작은 여자). 캬~ 그야말로 영화 속 한 장면이다. 하지만, 진짜 영화 같은 일이 기다리고 있는 줄 이때는 몰랐다.
몇 분 동안 신나게 달려 도착한 마트는 정말 ‘현지마트’였다. 진짜 ‘현지인들만 오는 마트’라는 뜻이다. 오토바이를 세워두고 가이드와 함께 마트로 향했다. 꽤 규모도 있고, 에어컨도 빵빵하게 나오고, 유니폼 입은 직원들도 보이는 깔끔한 마트였는데, 놀라운 건 그 안에 외국인이 나 혼자 뿐이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마트 안으로 들어서자 순식간에 날아와 꽂히는 수많은 시선이 느껴졌다. 그건 힐끔거리는 것이 아니라 놀라움이나 신기함이 섞인 듯 한 열렬한 시선이었다. 당황스러웠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맥주를 찾아 마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인기 연예인이 되면 이런 기분일까? 호기심 어린 그 시선들이 기분 나쁘진 않았지만, 너무 부담스러웠다. 빨리 맥주와 과일만 사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두리번거리던 그 순간, 갑자기 주변이 어수선해졌다.
“곤방와~ 도움이 필요해요?”(내가 일본사람처럼 보였나 보다. 일본말은 몰라서 대충 저런 뜻이지 않았을까 유추해 본다.)
“저 일본어 몰라요. 한국사람이에요.”
어느새 잔뜩 몰려온 마트직원들 중 한 사람이 일본어로 말을 걸었고, 내가 영어로 대답하자 내 주변에 몰려있던 다른 직원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하며 좀비 떼처럼 달려들었다.
“헤이~ 아가씨! 어떤 물건 찾아요? 내가 도와줄게요.”
“아니, 내가 도와줄게요. 뭐가 필요해요?”
“맥주 찾아요? 이쪽에 있어요. 나 따라서 와요.”
마트직원들이 서로 도와주겠다며 달려드는 바람에 나의 가이드는 멀찍이 밀려 떨어져 나가 버렸다. 나는 빠져나가려는 정신을 겨우 부여잡고 전시모드로 전환했다.(사실은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지으며 빠르게 걸어 다닌 것이 전부다.) 무례하지 않은 한도 내에서 거절하고, 대답해 주면서 눈으로는 빠르게 맥주와 과일이 있는 자리를 스캔했다. 겨우 물건을 고르고 보니, 계산대가 광화문 광장 끝에서 보는 세종대왕 동상처럼 멀게 보였다. 그 먼 길을 어떻게 걸어가서 계산을 하고 나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렵게 건물 밖으로 나와서야 겨우 좀비 떼에게 벗어날 수 있었고, 그때서야 내 뒤를 졸졸 쫓아 나오던 나의 연약한 가이드를 볼 수 있었다.
보디가드 역할까지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이런 위급상황이 생겼으면 나를 구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내 상상 속 청춘영화가 공포영화로 장르를 바꿔버렸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오토바이 뒷자리의 설렘은 사라져 버렸지만, 나의 가이드는 처음과 똑같이 안전하게 나를 태워주었다. 찜찜한 엔딩의 영화처럼 여주인공은 고맙다는 인사만 남긴 채 돌아섰고, 그렇게 그와의 추억은 거기서 끝났다.
하지만 나의 기분은 금방 좋아졌다.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지만 내 손에는 만족스러운 전리품이 들려있었기 때문이다. 숙소 도착 후 아줌마팀의 방으로 먼저 갔다. 넉넉히 사온 과일과 함께 거스름돈까지 야무지게 넘겨주고는 내 방으로 들어왔다. 피곤했지만 그래도 새로운 경험을 해봤다는 흥분감 덕인지 더 이상 아줌마들이 얄밉지 않았다. 시원한 맥주와 함께 모두를 축복하며(가이드와 아줌마들, 그리고 좀비 떼까지.) 조용히 발리의 밤을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