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그를 만난 건 발리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그는 나보다(난 여자 중에서도 작은 편이다.) 아주 약간 커 보일 만큼 작았고, 체중은 나보다(표준체중...이라고 생각한다.) 덜 나갈 수도 있을 정도로 왜소해 보였다. 피부는 커피색처럼 어두웠고, 그래서인지 환하게 웃을 때 보이는 치아가 유독 하얗게 빛나 보였다. 이발을 한지가 오래된 건지 이발을 원래 안 하는 건 지 모를 덥수룩한 커트머리 밑으로, 내 얼굴이 비칠 듯 한 맑은 눈이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눈이 나를 찾았을 때 초승달처럼 휘어지는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리게 재생되었다.
“안녕하세요. 미스 초이.. 씨 마즈시까요?”
약간 긴장한 듯, 떨림이 섞인 어눌한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 왔다.
스무 살은 넘었을까? 아무리 넉넉히 봐줘도 나보다 어릴 듯 한 남자. 그는 나의 여행가이드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당시 발리는 현지 가이드만 합법적으로 활동을 인정해 줬다. '발리 사람'만 여행사 가이드라는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한국사람 가이드' 와는 인천공항에서 안내사항 체크 후 빠이빠이 하고, 발리 공항에 도착하면 '발리사람 가이드'와 만나게 된다.
그렇게 만나게 된 가이드는, 이제 막 몰려들기 시작하는 한국 사람들 때문에 한국어 배울 시간이 부족했다며 떠듬떠듬 말해주었다. 우리 패키지 팀에 있는 사람들(기 센 아줌마팀, 수다스러운 모녀팀, 걱정 많은 자매팀, 걸음이 느린 부부팀 등.)을 통솔하기엔 약간 벅찰 듯 느껴지는 여리여리한 청년처럼 보여서 나는 그가 좀 걱정이 됐다.
하지만 내 걱정이 무색하게도, 그는 특유의 순수해 보이는 미소와 친근함을 앞세우고는 우리 팀의 모든 사람들이 만족할 만큼 매 순간 인솔과 안내를 잘 해내었다.
첫날 마지막 일정인 저녁식사를 마치고 우리를 태운 버스는 호텔 로비 앞에 있는 커다란 분수대 근처에 멈춰 섰다. 호텔방에 들어가서 시원한 맥주 한 캔 들이킬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을 만큼 갈증에 시달리던 나는,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호텔 근처에 마트나 편의점이 있기만을 바라며 창밖을 열심히 노려봤다. 하지만 내가 묵었던 숙소는 고급진 리조트임에도 불구하고 한적한 곳에 위치해 있어서인지 근처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호텔 로비에서 내일 일정과 출발시간 안내를 마치고 돌아서는 가이드를 급하게 불러 세웠다.
“저기요! 근처에 맥주랑 과일을 살 수 있는 곳이 있을까요?”
“어… 그게….”
그는 뭔가 생각하는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무겁게 입을 열었을 때. 그가 난처해 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걸어가는 거느... 조큼 멀어요. 우리 타고 온 버스... 아까 갔다... 없어요.”
이런 날벼락이. 걸어갈 수 없는 먼 거리에 마트가 있다는 건 오늘밤 내가 간절하게 원하는 맥주를 마실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다. 오 마이 갓! 내가 상상한 장면 중에 맥주가 빠져있는 장면은 전혀 생각한 적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호텔 로비에 있는 바(bar)에서 맥주를 마셔야 하나? 시원하게 씻고 난 후 방에서 편하게 마시고 싶은데. 그럼 룸서비스를 요청해야 하나? 비싸진 않겠지?'
갑자기 머릿속이 바빠졌다. 그때 천천히 돌아서는 내 축 처진 어깨를 그가 본 걸까? 그의 목소리가 나를 불러 세웠다.
“나... 오토바이 있어요. 같이... 타고 마트가... 괜찮아요?”
그의 어눌한 한국말은 자상한 마음씨를 더 부각시키는 것 같았다.
“마트까지 태워 준다고요? 그래주면 정말 고맙죠.”
그의 맘이 변할까 봐 그의 제안을 덥석 물고 나니, 분명 오토바이 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본 건, 초등학생 때 아빠가 운전하는 오토바이를 타봤던 것이 유일했다. 그런데 오늘은 외간남자가 운전하는 오토바이를 타게 생겼다. 그것도 발리에서.
‘오토바이 뒷자리에도 손잡이가 있었던가? 없으면 어떡하지? 처음 본 남자 허리를 잡아야 하는 거야? 꺄~’
곧 다가올 상황을 생각하느라 오토바이가 호텔 밖에 있다고 설명하는 그의 얘기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그를 따라 호텔 밖으로 나가기 위해 첫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