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커다란 발코니 창을 활짝 열어젖혔다. 훅 들어온 덥고 습한 밤공기는 싸늘한 에어컨 바람과 뒤섞이며 오히려 산뜻해졌고, 칠흑 같은 어둠과 은은한 조명이 수많은 야자수를 소리 없이 감싸 안고 있었다. 트윈룸의 침대는 더블 침대처럼 넉넉했고, 사용하지 않는 침대 위엔 아무렇게나 펼쳐둔 캐리어가 하늘하늘한 원피스 몇 벌을 토해내며 널브러져 있다. 묵직함이 느껴지는 원목 서랍장 위에는 적당한 크기의 TV가 놓여있고, 리모컨을 들어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봐도 온통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나오는 방송들뿐이었다. TV 옆에는 낯선 열대과일들이 라탄바구니 가득 담겨 있다. 호텔 측에서 준비한 환영의 선물인 듯하다. 투숙객이 과도를 준비하지 않았을 상황은 고려하지 못했는지, 껍질을 깎아 먹거나 잘라먹어야 하는 과일들이 많았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 선물로 내 기분이 한껏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으니, 호텔의 의도는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나 정말 혼자 떠나왔구나.’
혼자라는 두려움이 혼자라서 홀가분함으로 바뀌었고, 혼자 떠나온 여행이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음을 직감한 순간이었다.
그때 난 스물네 살이었다. 인천공항 항공권 티켓팅 라인에는 많은 사람이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며 자기 차례가 빨리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중엔 뻘쭘하게 혼자 서있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길게 줄 선 사람 중 여자들은 대부분 신부 올림머리를 하고 있었기에, 발리가 신혼여행지로 유명해졌다는 것이 실감되었다. 똑 단발을 하고 그들 사이에 서 있던 나는, 왠지 여행지 선택을 잘못한 건 아니었을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2004년 ‘발리에서 생긴 일’이라는 드라마가 엄청난 인기를 얻으며 종영한 지 불과 몇 개월 안 되었을 시기라, 당시 발리는 그야말로 여행지의 떠오르는 샛별이었다. 드라마도 보지 않았고 결혼 계획도 없던 스물네 살의 똑 단발 소녀(그냥 키가 작은 여자라는 뜻으로 받아들여 주시길….)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조용한 휴양지에서 푹 쉴 생각만을 하며 여행사의 ‘발리 패키지’를 당당히 선택했던 것이다.
그렇게 나에게도 ‘발리에서 생긴 일’이 펼쳐지게 된다.
지금은 자유여행을 선호하지만, 당시엔 여행사 패키지 상품을 통해 발리에 갔다. 혼자 여행을 가겠다는 딸 걱정으로 불안해하시는 부모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안심시켜 드리기 위한 나름의 조치였다. 부모님께 대형 여행사 상품의 꼼꼼하게 짜인 일정표까지 제출하며 허락을 구하려 노력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어디 여자애가 겁도 없이 혼자 여행을 가? 그것도 국내도 아닌 해외를?’이라는 말이었다.
나는 대학교 4학년 때부터 일을 시작했다. 사회초년생에게 돈을 버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2년 넘게 일하는 동안 밤마다 눈물을 쏟거나 술을 퍼마시는 날이 많았고, 어떤 날은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하기도 했다. 그러다 내 몸에서 사리가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때쯤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는데, 그때 내가 가장 원했던 건 ‘쉼’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아무것도 안 하고 싶었다. 그래서 무작정 여행사를 찾아가 푹 쉴 수 있는 여행지를 추천받았고, 20만 원의 추가 비용을 지급하면서까지 ‘2인 1실’ 기준의 방을 혼자 사용하기로 했다. 그만큼 나는 이 ‘쉼 여행’이 절실했다. 출발 당일까지도 여행을 말리던 부모님을 뒤로하고, 그렇게 나는 도망치듯 캐리어를 끌며 집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