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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귤 May 25. 2023

타락죽 나눠 먹는 사이

오늘 밤 따끈한 우유 한 잔 어떠세요?

날씨가 서늘해져 고종이 새벽녘 기침이 잦고 기력이 허하니 내의원에서 타락죽을 처방했다. 조선 시대 궁중에서는 좋은 음식은 약으로 생각하여 먹게 한다는 ‘약식동원’의 뜻에 따라 내의원 처방이 필요한 음식이 있었다. 불린 멥쌀을 우유에 넣고 끓인 타락죽도 내의원에서 직접 관리하는 보양 음식이었다. 타락죽은 왕의 원기를 회복시키기 위해 특별한 경우에 상에 올라왔는데, 7시 이전 이른 아침에 먹는 초조반상에 탕약 대신으로 올라오곤 했다. 


타락죽 한 그릇


타락죽이 궁중 보양식으로 내의원의 엄격한 관리를 받은 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과거 조선에는 젖소가 없었고, 유교적 이유로 소의 젖을 인간이 뺏어 먹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기지 않았다. 또한, 우유는 신선함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멀리 떨어진 곳에서 우유를 배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의원은 서울 동쪽에 위치한 낙산에 왕실 전용 목장을 설치하여 직접 소젖을 채집하였다. 그만큼 우유는 귀한 식재료였고, 철저히 궁중 음식으로만 사용될 수 있었다.      


낙산 공원 가보셨나요?


고종은 타락죽을 매우 좋아하여 재위 말년을 제외하곤 매년 타락죽을 즐겼다. 타락죽은 왕의 진상 없이는 함부로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기 때문에, 고종과 함께 ‘타락죽 나눠 먹는 사이’가 된다는 것은 굉장히 특별한 의미이다. 7시 이전에 먹는 초조반상에 드는 음식을 함께 먹을 수 있다는 것은 특히 ‘왕과의 동침’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의술에 능했던 약방기생 ‘석경월’은 고종에게 ‘수양산가’를 불러주며 깊이 총애받았던 인물로 기록된다. 10월 어느 날, 서늘해진 날씨에 고종은 타락죽을 처방받았고, 이전날 동침한 석경월은 타락죽을 함께 먹게 되었다. 추운 새벽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끈한 타락죽은 고소하고 부드러웠다. 석경월이 지금껏 먹은 어떤 음식보다 황홀한 맛이었다. 왕과 타락죽을 나눠 먹는 기생, ‘분락(分酪)기’가 된 석경월은 금세 궁녀들의 부러움을 샀다.      


요즘에는 누구나 쉽게 우유를 구할 수 있다. 아침 일찍 쌀가루를 우유에 끓여 타락죽을 만들어 먹는 일이 흔치는 않지만, 쉬이 잠이 들지 않는 밤 우유를 데워 먹은 경험은 한 번쯤 있을 것이다. 모락모락 따끈하게 데워 고소함이 올라온 우유에 설탕 한 자밤을 섞어 달큼하게 마셔보면, 고종이 우유를 제때 준비하지 못한 관리를 크게 벌하려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잠들기 전, 아침 일찍, 소중한 사람과 함께 우유를 나눠 마시며 ‘분락’의 의미를 새겨본다. 음식을 나눠 먹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 사이인지 감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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