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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귤 May 31. 2023

세조가 좋아하는 랜덤 게임


슬퍼서, 기뻐서, 힘들어서, 심심해서, 반가워서, 용기가 필요해서, 술을 마시는 데는 수만 가지 이유가 따라 붙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수만 가지 중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해 ‘그냥 마시는’ 술이 유독 달다. 대학가 근처로 온다면 이런 ‘이유 없는 술자리’를 자주 볼 수 있다. 자신의 자리를 찾아 어기적거리며 돌아온 병사처럼, 대학생들은 영문도 모르는 표정으로 술집에 앉는다. 그러다 보니 생경한 사람 옆자리에서 술을 마시게 되는 경우도 다반사다. 처음 마주하는 사람들과 MBTI부터 출신 고등학교까지 나누고 나면, 슬슬 이야기 소재가 고갈된다. 그때 어색함을 깨기 위해 통일신라 시대부터 내려온 전통문화가 있으니, 바로 ‘술 게임’이다.    

  

술게임 좋아하시나요?


가장 좋아하는 게임은 ‘아파트’ 게임이다. 이유는 쉽다. 간단해서. 술에 취할 만큼 취하고 객기로 앉아 버틸 때도 아파트 게임만큼은 쉽게 참여할 수 있다. “아파트”를 4번 반복해 부른 뒤, 원하는 층수를 말하며 손을 중앙으로 쭉 뻗어내면 그만이다. 내 손 위아래로 사람들의 손이 차곡차곡 쌓이면 아까의 어색함은 서로의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줄어든다. 주최자가 외친 층수에 손바닥을 올린 사람은 ‘원샷’에 처한다.     


유흥은 우리 조상들에게도 가장 중요한 문화 중 하나였다. 신라의 안압지에서 발견된 14면의 주사위, ‘주령구’는 우리에게 신라 귀족들의 술 게임을 전해준다. 각 14면에는 벌칙이 새겨있는데, 소리 없이 춤추기, 얼굴 간질여도 꼼짝 않기, 시 한 수 읊기, 한 번에 술 석 잔 마시기, 스스로 노래 부르고 마시기 등이 그것이다. 주사위를 굴려가며 술자리의 흥을 돋군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목제 주령구 


조상들의 술 사랑은 조선왕조실록에도 확인할 수 있다. 그 중 무려 467건의 ‘술자리’가 적힌 세조실록을 보면, 세조가 ‘술자리 정치’를 얼마나 중하게 여겼는지 짐작할 수 있다. 대부분의 술자리에서 1차의 아쉬움 때문에 2차를 갖는 모습이 공통적이고, 신하에게 춤을 추게 명하는 일도 잦았다고 전해진다. 숙주에게 자신의 팔을 꼬집어 보라는 당혹스러운 명령을 내리기도 하고, 신하를 취한 모습을 평가해 벼락 승진 혹은 참형에 처하게도 했다.      


사실 세조가 ‘술자리 정치’를 가진 것은 신하들과 밤새 격의 없이 소통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비정한 군주로 기억되는 만큼, 세조의 권력엔 늘 정통성 시비가 꼬리표로 붙었다. 칼로 권력을 잡은 이미지가 강했기에 세조는 더욱 소탈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부각하고 싶었을 것이다. 신하들에게 함께 술잔을 주고받자고 권할 만큼 친근하게 다가가 자신의 정치 기반을 다졌다. 물론 신하들이 왕과의 술자리를 얼마나 반겼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아파트, 아파트’ 외칠 수도, ‘임금님은 당연히 원샷이겠죠~?’라고 벌주 ‘원샷’을 권할 수도 없었을 노릇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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