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은 밥이 될 수 없지만 빵을 밥만큼 먹는 저예요. 그런 인간이 겪은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니까요, 빵에 대한 전문 지식(이론)을 기대하시는 분은 읽기를 멈추어 주세요.
올해 3월, 꼭 필요한 물건을 구하기 위해 적지 않은 돈을 마련해야 했다. 쓰지 않고 모셔 놓은 살림들이 모조리 거실로 나왔다. 사진을 찍고, 가격을 매겨 중고거래 앱에 올렸다. 판매글을 올리자마자 성사가 이루어진 거래부터 가격 조정, 배송 방식 등 구매자와 조율을 하느라 다소 시간이 걸리는 거래까지 다양한 사람과 상황을 만났다. 20일 동안 스무 개의 물건을 팔고, 136만 원을 벌었다. 덕분에 필요한 물건을 제때 손에 넣었고, 판매에 재능이 있는 나를 처음으로 발견했다. 판매 목록 중에는 침대프레임도 있었다.
나는 철제로 된 침대에 로망이 있었다. 2년 전 지금 살고 있는 구옥으로 이사를 오면서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하얀색 철제 프레임을 구입했었다. 첫날, 꿈에 그리던 침대에서 잠을 청하니 자다가 침대가 천장으로 뜨는 것은 아닐까 할 만큼 즐거웠다. 그리고 둘째 날······ 나는 바로 후회했다. 10년도 넘게 한 이불을 덮고 자던 나의 개가 자기도 침대에 올려달라고 떼를 썼기 때문이다. 모른 척하고 내가 잘 대로 자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평생 잠자리의 눈높이가 같던 우리는 달라진 높이를 받아들이는 걸 퍽이나 어려워했다. 침대에서 한 팔을 방바닥까지 축 떨어뜨리고 개의 등을 쓰다듬었다.
"괜찮아. 엄마 여기 있어."
어쩌면 개는 침대에 오르기를 이내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내 마음이 문제였다. 나이가 들어서 눈과 귀가 어두워진 개가 자꾸 염려가 되었다. 잠자는 도중에 살결이 쉬이 닿던 녀석이 확인되지 않자 불안했다. 어두운 밤에 화장실을 찾으려고 방문 앞을 헤매고 있는 건 아닌지, 나를 깨우려고 침대 아래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지는 않을까 차마 잠들 수가 없었다. 녀석을 침대로 올렸다. 그제야 나와 녀석의 심장 소리가 차분해졌다. 함께 이불을 덮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행여나 잠결에 내가 녀석을 바닥으로 떨어뜨리지 않을까 불안한 것이다. 잠은 쏟아지는데 쏟아지는 잠을 맞받아치며 잠이 들어서는 안 되는 어처구니없는 밤이 되고 나서야 나는 침대를 버리기로 했다.
바닥에 매트리스만을 놓자 개는 껑충껑충 잘도 오르내렸다. 침대 프레임의 조립을 몽땅 풀었다. 배송이 되었던 날, 조립을 하다가 힘조절에 실패해서 구멍이 난 곳에는 같은 색의 코르크 스티커를 동그랗게 붙여 놓았다.
"우리가 침대는 무슨 침대야~"
이게 팔릴까, 싶었는데 침대프레임을 중고거래 앱에 올리자마자 연락이 왔다. 거래할 시간과 장소를 정했다. 구매 변심에 대한 계약금은 따로 요구하지 않았다. 구입 희망자는 도리어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구입 의사를 확실히 밝혔다. "저는 oo에 있는 B빵집 사장입니다." 8년 전 제주에서 처음 살았던 동네에 있는 빵집이었다. 시골 '리내'에 있는 아주 작은 빵집, 손님이 없어서 늘 한산하고 매대는 심심해 보이기까지 했던 초라한 가게였다. 더구나 바로 맞은편에는 육지에서 유명한 대형 빵집의 체인점이 있던 터라 더 비교가 되었다. 그랬던 B빵집이 근래 들어 내가 그 동네를 방문할 때마다 북적북적했다. 예전과 같지 않아서 궁금하던참이었다.
B빵집 사장은 약속 장소에 도착하기 직전까지도 밀가루를 만지다가 온 것으로 보였다. 나는 판매할 물건을 꺼내 사장에게 확인시켰다. 사장에게 코르크 스티커가 붙은 곳을 보여주자 상관없다고 말했다. 침대 프레임은 아들이 쓸 거라고 했다. 거래가 끝나고 돌아서는 사장에게 나는 물었다.
"사장님. 근래에 빵집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던데 무슨 일이 있었나요?"
사장은 밖으로 나가던 몸을 다시 내게 돌리고 지난 일들을 들려주었다. 유명한 빵집을 앞에 두고 안 그래도 어려운 마당에 코로나까지 덮쳐서 죽을 맛이었단다. 사장은 그 시기에 가게에 처박혀서 오직 신메뉴 개발에만 전력을 다했다고 했다. 3년 후에 코로나 사태가 진정이 되고 자신이 만든 메뉴로 장사를 이어가던 어느 날, 부르지 않은 손님들이 다녀간 이후로 갑자기 가게가 떠들썩해졌단다. 영문을 모르고 있던 사장은 대형 SNS인플루언서 두 명이 차례로 빵집을 다녀간 사실을 뒤늦게 알았단다. 그들이 다녀가고 적막했던 빵집이 이렇게 변했다고 했다. 정말로 그랬다. 같은 건물, 같은 간판, 분명 내가 8년 전에 알던 빵집이 맞는데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전에 따로 홍보를 하신 건 아니고요?"
"쓸 돈도, 알아볼 시간도 없었어요. 그냥 나는 내가 할일(메뉴 개발)을 계속했어요."
사장이 바쁘게 일터로 돌아가고 마당에서 나는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대단한 끈기와 엄청난 운이라는 것이 교차하는 지점. 그 순간을 맞이한 사람이 방금까지 내 앞에 있었다. 인생을 살면서 그런 순간을 스스로의 힘으로 일구고, 노력이 세상에 알려지는 기회까지 오다니. 뭔지 얼떨떨하고 가슴 한편이 찡해 왔다.
그때 마당 구석에 길쭉한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저녁나절에 거래를 하다 보니 어둑한 곳에서 침대 프레임 하나를 빠뜨린 것이었다.
'이런··· 내가 가야겠네.'
본의 아니었지만 사실 나는, 빵집에 가고 싶었다. 내가 방금 만난 사람의 빵집을 정말로 가보고 싶어졌다. 그러자 같은 지역에 있던 A빵집(B빵집의 맞은편에 있는 집은 아니에요)이 기억에서 불쑥 떠올랐다.
B빵집 사장님! 이걸 빠뜨렸어요~
⦅ A빵집 ⦆
빵집 건물이 으리으리하다. 입구에서 홀을 따라 빵이 진열된 곳까지 들어서면 넓은 실내와 탁 트인 바다뷰에 놀라고, 깔끔하고 아기자기한 빵 디자인에 눈이 홀려서 서너 개 담다 보면 두 끼 식사를 능가하는 가격에 계산대에서 두 번 놀란다. 시식이 가능한 빵은 없다. 무표정한 종업원이 1 인당 1 음료를 주문해야 한다며 가게의 이용 원칙을 시크하게 알린다. 혹시나 인당 1 빵을 능가하는 개수로 빵을 구입했으니 음료를 더 주문하지 않아도 괜찮은지 양해를 구해본다. (빵집을 방문하기 전에 음료를 먹고 온 터라 2인에 음료 하나만 주문했었다.) 따로 포장한 빵까지 약 3만 원어치를 구입했다. 종업원은 음료를 한잔 더 주문하지 않으면 매장을 이용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종업원의 얼굴은 오븐에서 태워버린 빵껍데기처럼 굳어 있다. 친절하지 않은데 불친절하지도 않으려고 손님의 부탁을 근엄하게 꺾는다. 그러고 보니 직원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반반한다. 그들의 어투는 잘난 이곳을 이용할 거면 하고 아니면 나가라,라는 식으로 들린다.
'이렇게까지 빵을 먹어야 해?'
광고 덕분인지 늘 관광객으로 붐비는 빵집이다. 빵맛도 괜찮다. 풍경도 괜찮다. 그래서 육지에서 친구가 오면 종종 찾는다. 직원의 태도와 빵 가격은 괜찮지 않지만 함께 온 친구를 곁에 두고 성질을 내고 싶지 않다. 그러면 친구의 여행을 망치게 된다. 계산대에서 조금만 더 버티다가는 뒤에 줄을 선 이들에게 진상으로 찍힐 판이라서 빵을 포장해 달라고 했다.
빵집에서 보았던 바다에 차를 세우고 친구와 빵을 뜯었다.
"맛은 있네······"
빵맛은 있는데 기분은 빵만큼 맛있지가 않다.
그렇게 기억이 흐려지고 다시 그곳을 찾아서 꼭 똑같은 후회를 몇 차례 더하고 나서야 나는 A빵집에 발길을 끊었다.
⦅ B빵집 ⦆
중고물품을 구입하기 위해 내 집까지 와준 구매자다. 물건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은 건 내 책임인 것 같아서 내가 마무리를 해야 했다. 마당에 덩그러니 남은 철제 프레임 하나를 차에 싣고 B빵집으로 갔다. 차에서 내리자 사장이 가게 밖으로 나와서 물건을 받아 주었다. 빵집 내부는 발 디딜 틈이 없다. 시간을 오래 뺏을 수 없어서 사장에게 간단히 인사를 하자사장은 내게 물건을 갖다 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조리실로 곧장들어갔다.
8년 전, 내가 알던 그 가게가 아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한산했던 가게 앞이 비상등을 켠 차들로 가득했다. 조그만 가게가 덩치 큰 공룡처럼 쿵쿵, 하고 안팎에서 기운이 들썩였다.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트레이를 들고 손님의 물결에 몸을 맡기고 가게를 한 바퀴 돌았다. 작은 매대가 무색하게 다양한 메뉴가 눈을 사로잡았다. 가격은 착했다. 시식은 모든 메뉴가 가능하고, 시식 가능한 양은 무한이다.
이 빵, 저 빵을 입에 넣는데 혀가 재밌다. 한 바퀴 돌고 두 바퀴 매대를 돌자 배가 불러온다. 먹어보지 않은 빵맛이 궁금해서 혹시 놓친 빵이 없나 살핀다. 시식용 빵 한 조각이 너무 크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채지만 늦었다. 빵빵한 배 때문에 더 이상 빵 생각이 나지 않는 지경이 되어버린다. 함께 간 지인의 상태도 마찬가지다. 도토리를 가득 문 다람쥐처럼 두 볼이 오만가지 빵으로 빵빵하다. 시식으로 온 빵을 다 먹어버린 기쁨과 감사함에 뭐라도 트레이에 담아야 할 것만 같다. 1인 1 빵, 이라는 글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미안하고 감사해서 트레이에 1 인당 한 개의 빵을 담는다. 그 이상은 도저히 먹을 수가 없다. 계산을 하는데 직원이 내가 고른 빵과 내 모습을 상냥하게 훑는다. 그리고 좁아터진 매장에서 빵을 고르고 있는 손님을 한쪽으로 물리치고 뜬금없이 빵 하나를 집어서 계산대로 돌아온다. 종업원이 계산을 마친 종이백에 빵을 넣으며 웃는다.
"이건 서비스예요."
'안 돼요~!'
굳이? 사양하고 싶다. 더 이상 먹을 배가 없는데 빵 하나가 서비스란다. 서비스로 제공하는 빵은 손님이 고른 빵(취향)에 달렸는지 손님마다 종류가 다르다. 고작 빵 두 개를 샀는데 밥 한 끼의 가격에 미치지 않고 무려 빵 하나가 더 생겨 버렸다. 빵집을 나오려는데 구석에 커피 머신이 보인다. 빵을 구입하면 커피는 무료,라고 적혀 있다. 맙소사······
아이스커피 두 잔을 뽑아서 밖으로 나온다. 손에는 (지금은) 전혀 당기지 않는 빵이 세 개나 들었다. 빵집에서 산 빵을 먹기도 전에 두 사람의 배가 빵빵해서 기분도 덩달아 빵빵하다. 사장님께는 죄송하지만 향후 1년간 빵 생각이 안 날 것 같다, 라며 친구와 웃어보지만 얼마 못 가서 빵 생각이 다시 날 거라는 것을 안다.
그러면 나는 B빵집을 찾는다. 유명 빵집과의 경쟁을 자기 자신과의 사투로 멋지게 승화시킨 내가 아는 세상에서 가장 작고 멋진 빵집을 말이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무엇을 일구고 있는가?
그것으로 당신을 빵빵하게 해주고 있는가?
빵빵한 빵집
⚶개똥도 약에 쓰이는, 우리 집 철학⚶
빵집에서 산 빵을 먹기도 전에 두 사람의 배가 빵빵해서 기분도 덩달아 빵빵해졌대. 너를 빵빵하게 하는 것들을 일구고, 나를 빵빵하게 하는 이들을 응원해. 기준은, 빵빵하게! 우리의 하루는 빵빵해야 해.
오늘 하루도 빵빵하였는가
❙ 저자의 경험담입니다. '맛집'의 기준은 저마다 달라요. 저자는 제빵 지식이 없으며 A, B빵집과 아무 관련이 없어요. 그저 빵빵한 기분으로 배부른 이야기가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