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여전히 나는 물리치료사이다.
내 인생은 언제나 즉흥이었다. 그리고 중간이었다.
초중고 시절에도 항상 성적은 중간에서 중상위권. 상위권도 하위권도 아니다. 안 하고 싶으면 진짜 안 하거나 해야 할 건 적당히 하는 성격이다. 스스로 피곤하게 만드는 건 딱 질색인 성격. 하지만 또 나 혼자 뒤처지거나 나 혼자 못하는 건 싫어서 무언가를 목표로 삼을 때는 급하게?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다. 이런 성격은 어릴 때부터 지금도 그러는 거 보면 어렸을 때 성격이 완성된다는 사실이 맞는 듯싶다. 사실 공부보다는 뭔가 손으로 끄적이거나 만드는 걸 좋아해서 요리사가 되고 싶기도 했고 뭔가 공부 말고 다른 활동적인 독창적인 걸 하고 싶었는데 작은 지방에만 살아서 그런지 다른 직업이 뭐가 있는지도 몰랐었다. 물리치료사라는 직업을 선택할 때도 내가 아닌 아빠의 추천을 받아 1분 만에 결정을 한 거였고 지원을 할 때도 "아빠, 근데 물리치료사가 뭐야?"라고 질문을 했었다. 참 순수했다고 해야 할까 단순하다고 해야 할까? 내 인생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즉흥인 것처럼 하지만 운명처럼 흘러간다. 1분 만에 물리치료과를 선택하여 지금은 우리나라 대기업회장과 유명인을 치료하는 치료사가 된 스토리는 천천히 들려주고 싶다. 내 글의 주제는 본업이 아닌 꿈을 위한 도전이니깐.
본론으로 들어와서, 책임감은 있는 성격인지 내 선택이 아니었던 내 직업에 대한 커리어는 꾸준히 성실하게 쌓아갔다. 외국도 다녀오고 학회활동도 열심히 하며 내 이력서는 나름 볼만해질 정도가 되었고, 서울에서의 삶도 안정적이 되어가고 있지만, 계속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이렇게 같은 일만 반복하면서 살 거야? 무언가 멋져 보이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아?
이러한 마음의 움직임은 사실 1년 차 때도 있었다. 난 문과인데 끄적이는 감성이 충만한 성격인데 병원에서 하루종일 반복된 삶이 맞나 싶어서 네일아트 자격증을 딴 적도 있었다. 결국 취미와 좋은 추억으로 남겨졌지만..
두 번째 마음의 꿈틀거림이 심하게 왔었을 때는 4년 차쯤 되었을 때였다. 1년 동안의 학회공부와 병원생활을 병행하며 인생에서 가장 바쁜 해를 보냈었고 학회공부를 마치자마자 잘 다니고 있는 병원에 사표를 건넸다. 이유는? 너무 쉬고 싶었고 내 인생의 다음 단계로 가고 싶었고 유럽여행이 너무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왜 유럽에 꽂혔을까
이것도 지금 과거를 생각해 보면 그 시간들은 내 인생에서 꼭 필요한 흐름 중 하나였다. 유럽 한 달 배낭여행 전과 후의 나의 삶은 같을지라도 나의 마음은 완전히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영어를 잘하지 못하지만 생존영어는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혼자 배낭여행을 떠났고 성공적으로 건강하게 잘 돌아왔다. 한 달 동안 매일 도전이라는 걸 해서 그런가 도전정신이 더욱 강해진 나로 변한 건 확실하다.
한국에 돌아와 여행하는 동안 영어가 부족하다는 나 자신에 대한 현타가 와서 미친 듯 영어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언어교환 사이트에 가입해서 외국인 친구도 사귀었다. 나보다 두 살 어린 미국인 여자아이였는데 한국문화와 케이팝을 좋아해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싶어 했다. 나는 영어로, 친구는 한국어로 매일 일기를 써서 서로 첨삭을 해주기도 하며 언어 공부를 같이 하던 중 친구가 한국에서 영어선생님으로 일해보고 싶다고 온다고 한다! 온라인으로 만났던 내 인생 첫 외국인 친구가 한국에 왔다. 알고 보니 엘리트 집안의 딸인 내 미국인 친구. 아빠는 의사에 엄마는 미국에서 큰 알파카 농장을 운영하신다고 한다. 혼자 한국에 와서 도전하는 내 친구가 기특하고 안쓰럽기도 해 우리 가족이 정말 잘 챙겨줬다. 그런 마음이 고마우신지 친구 부모님께서는 나에게 알파카로 만든 머플러나 양말, 코트 등 선물들을 미국에서 종종 보내주셨다.
꿈을 꾸다 보면 머릿속에서 상상하던 일들이 현실이 되기도 한다.
어느 날,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히 한국에서 이런 알파카 제품들 거의 없는데 팔아보면 참 좋겠다는 대화를 했었다. 물론 내가 꺼낸 이야기였지만. 그리고 그 후로는 '알파카를 팔고 싶다'라는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 자주 들어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지금은 미국에 계시는 친구 부모님에게 완성된 제품들을 받아서 팔기만 하다가 나중에는 더 다양하게 디자인도 해보는 거야' '브랜드 이름은 무엇으로 할까?' '한국으로 택배 받으면 네이버 스마트스토어를 만들어서 팔아봐야지' 몇 달 동안은 그냥 상상만 했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 친한 오빠를 우연히 만났다. 온라인 마케팅, 유통 그리고 와디즈 쪽에서 활발하게 사업을 크게 하는 사업가고 나처럼 상상이 많은 사람이라 상담을 했다. '내가 요즘 이런 게 하고 싶은데 어떤 거 같아?' ' 오, 너무 좋은데? 같이하자!.' 내 상상을 지원해 주는 사람이 나타났다. 사업은 다 이렇게 시작하게 되는 건가 운명인 것처럼 내 상상 속의 사업은 실제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간단히 소소하게 팔려고 했던 나의 계획은 패션 브랜드 론칭이라는 이름이 되어버렸고, 친구와 무려 각각 천만 원이라는 돈을 투자하여 머플러를 구입하고, 브랜드 로고 및 룩북촬영, 제품 상자제작 등 정말 진지한 일을 해버렸다.
룩북 촬영하던 날 우리의 제품들을 멋진 외국인 모델들이 입고 사진작가가 촬영을 하는데, 친구와 서로를 바라보면서 '이거 영화에서 보던 장면 아니야?? 진짜 우리들이 하고 있는 일 맞지?' 라며 어리둥절하면서 꿈을 실행하고 있는 우리들 자신을 바라보며 신기하고 행복해서 자꾸 웃음이 나왔었다. 그리고 말했다. "이게 실패하더라도 나는 이것으로 충분할 거 같아. 후회는 없어! 평생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일들을 해보고 있으니깐!" 친구도 그 말에 동의했다.
우리 브랜드의 론칭과 첫 펀딩을 위해 미리 구입한 알파카제품들이 미국에서 도착했다. 박스를 열어보았다. 엥? 알파카머플러는 없고 무슨 대형 기계가 들어있었다. 우리 머플러들 어딨어? 무려 천만 원어치의 주문이었다. 답답한 항공사는 분실한 박스들을 추적하는데 거북이처럼 느렸다. 이미 펀딩이 시작되었기에 마감날짜 안에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와야 했다. 혹시 몰라 우리가 받은 박스에 적힌 번호를 보니 국가번호가 독일이었다. 무작정 국제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혹시 국제택배 받은 거 있냐고 하니 있다고 했고, 열어보라 했더니 머플러가 들어있다고 한다. YES! 알고 보니 독일로 가야 할 장비가 우리에게, 우리의 머플러는 독일에 있는 것이었다. 사업이 잘 흘러가나 싶었는데 역시나 고난이 있긴 하구나. 독일과 한국 수취인끼리 행방을 찾은 덕분에 항공사는 그 후 일처리를 빨리해 주어서 다행히도 예정했던 배송기간에 배송할 수 있었다.
준비과정에서 탈이 많았던 브랜드 론칭 와디즈 펀딩의 첫 매출은 무려 천만 원. 우와 처음부터 거의 본전을 벌다니 대박인데! 두 번째 와디즈를 위해 첫 매출을 다시 제품을 구입하는 걸로 재투자를 하였다. 두 번째 와디즈에서는 기대보다 낮았던 300만 원의 매출. 재고가 쌓였다. 머플러는 겨울상품인데 봄이 오고 있었고 재고를 팔기 위해서는 계속 펀딩을 열어야 하는데 우리를 도와주던 사업가 오빠의 회사도 너무 바빠져서 우리의 펀딩을 계속 지원해 주라고 하기에는 너무 미안했다. 이제 독립해 보자. 어떤 식으로 굴러가는 건지 알았으니깐 스스로 해보는 거야.
네이버 스마트 스토어를 열었다. 일주일이 지나도 주문 건은 0건. 검색해도 상위권에 나오지도 않았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났는데 메시지가 한 통 와있었다 '네이버 스마트 스토어에 새로운 주문이 1건 들어왔습니다.' 그 주문 1건에 기쁨의 소리를 질렀던 기억이 난다. 이제 시작인 걸까! 너무 행복한 나머지 엽서에 감사와 행운의 메시지가 담긴 손편지와 작은 사은품과 함께 택배를 보냈었다. 편의점 택배..
천만 원이 넘는 머플러 재고가 내 방안에 쌓였다
그리고 한 달 동안 다시 주문 건은 0. 우리 집에 쌓여있는 머플러는 100개 이상이 남았다. 다 팔면 천만 원이 훨씬 넘는 가치의 재고였다. 하지만 봄이 오고 여름이 되어서 알파카의 계절은 끝이 났다. 재고는 그냥 방치해 둔 상태에서 겨울이 오면 다시 팔아봐야지 라는 단순한 마음과 함께, 투자한 천만 원은 꿈을 위해 사용한 돈이다라는 마음을 되새기고 있었기에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다. 겨울이 왔다. 내 미국인 친구는 그 사이 남자친구가 생겼었고 내년에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심지어 변호사가 되기 위해 미국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우리 통장에는 사업투자금 2000만 원 중 300만 원이 남아있었고 각각 150만 원씩 나눠가지면서 그래도 우리가 새로운 일들 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인생의 좋은 추억으로 남았으면 되었다고 서로를 다독이고 격려해 주며 친구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난 이 겨울을 그냥 보내면 또다시 일 년이나 머플러를 쌓아둬야 하기에 한 개라도 팔아보자는 마음으로 와디즈에 들어갔다. 혼자서라도 와디즈 펀딩을 열어보기로 했다. 고객센터에 수시로 전화해 보면서 '이거 누르면 돼요?' '그다음엔 뭘 해야 해요?' 질문을 하면서 드디어 펀딩 원고 작성완료! 하지만 와디즈 어렵다. 4번 정도의 재검토 요청이 들어왔고 계속 수정을 하면서 드디어 통과.
100% 스스로의 첫 펀딩 매출은? 무려 천만 원.
뭐라고? 이게 된다고? 드디어 절반 팔아서 80개 정도 남았다. 열심히 집에서 80개를 상자에 포장하고 택배박스에 넣어 이틀에 나눠 편의점에 들고 가 택배를 부쳤다. 참 나도 열심히 사네. 하지만 힘들지 않고 너무 재밌잖아! 내가 스스로 해서 내가 한 만큼 돈을 번다는 느낌이 이런 건가. 겨울이 가기 전 한번 더 앵콜 펀딩을 빠르게 열어서 매출 400만 원. 내 재고가 줄고 있다. 본전이 채워지고 있다. 다시 겨울이 왔고 그다음 해 그리고 작년까지 총 3번의 겨울 동안 와디즈를 열어서 드디어 다 팔았다!! 이제는 한국에서 만날 수 없는 정말 좋은 알파카 머플러라서 20개 정도는 가족들에게 그리고 고마운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리고 나도 몇 개 가지고. 총 삼 년이 걸려 결국에는 내 방에서 동거동락하던 알파카들을 다 팔았던 내 끈기에 대해 다시 한번 칭찬해주고 싶다. 집에 가득 쌓여있었던 남은 포장상자들을 버리고 몇 년 만에 깨끗해진 내 방 한 구석. 시원섭섭하다. 본전 찾은 게 어디야.
이렇게 나는 패션브랜드 CEO가 사 년 동안 되어보았다. 사 년 동안 겨울에만.
하지만 잊지 말자. 나는 여전히 물리치료사로 일하고 있다. 여전히 같은 직장 같은 직업으로. 사 년 동안 겨울에만 잠시 패션브랜드 사장이었다. 온라인으로만 사장. 하지만 겨울만 되면 에너지가 솟아났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느낌과 책임감이 좋았다. 쭉 일이 잘 되어서 내 본업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냐만 그것도 사장이라는 이름으로. 하지만 괜찮다. 이 만큼만 하는 게 내 운명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알파카로 패션브랜드를 만들어 보겠다고 뛰어든 일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었던 것 같다. 내 남편을 만나기 위해서 운명의 흐름이 나를 데려온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일로 인해 진짜 패션브랜드의 사장인 내 남편을 만났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 인생을 한번 뒤돌아보자. 지금의 나, 지금의 내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과거에 꼭 필연적인 일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느껴본다. 어느 과거까지 가야지 이 순간의 시작으로 갈 수 있을까? 미국인 친구를 만나지 않았다면? 내가 유럽여행에 가서 영어에 자극을 받지 않았다면? 현타로 잘 다니던 직장을 두지 않았다면? 초기 브랜드 론칭을 도와주었던 오빠를 과거에 만나지 않았더라면? 모든 과거들이 하나로 모여 현재의 큰 하나를 만든다. 결국에는 지금 남편을 만나라고 이 많은 과거들이 필요했을까? 혹은 더 있을까. Everything happens for a reason.
하지만, 나는 여전히 물리치료사다. 여전히 같은 일을 12년째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샐러드카페 프랜차이즈 창업주이기도 하다. 아직도 나는 도전하는 중이다. 내 마지막 직업을 찾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