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의 '안녕이라 그랬어'를 읽고
'바깥은 여름'의 작가 김애란에게 맹목적으로 끌렸다. 책을 읽기도 전에 말이다. 좀 유치하긴 하지만 사계절 중 내가 태어난 계절이 여름이었고, 책 표지가 하늘색이어서... 좋아하는 계절과 색깔, 단순히 나와의 연관성을 짓는 것만으로도 그냥 끌렸다. 책을 읽고 나서는 더욱 그가 좋아졌다. 김애란 작가의 '이중 하나는 거짓말'은 내가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억울함에 잔뜩 화가 있던 무렵 출간되어 내 마음을 달래준 책이어서 그런지 더 애정이 간다. 감미로운 브라운아이즈의 노래 제목처럼 '벌써 1년'. 그간 화를 다스리는 평정심과 끓어오르는 감정을 내 안의 머무르게 하는 힘은 좀 커진 듯하나 그래도 불쑥불쑥 올라오는 그 무언가는 한 인간에 대한 증오까지 간 것 같다. 주위에선 그냥 무시하라고 하지만 나의 성정상 그렇게 잘 되지 않는다.
김애란의 소설을 읽다 보면, 내 안에 잠들어 있던 감정들이 서서히 깨어나는 걸 느낀다. 처음엔 그게 불편했지만, 이젠 안다. 글이 나를 흔드는 순간이야말로 내가 나를 마주하는 때라는 걸.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말했다. “무의식, 즉 억압된 감정은 치료에 저항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의식의 억압을 뚫고 나와, 현실적 행동이나 말로 해소되기를 바란다.”나는 말 대신 글을 택했다. 어쩌면 내 마음이 가장 안전하게 터질 수 있는 방식이 글쓰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감정을 다 말하지 않아도, 문장 안에 그것들을 풀어놓고 나면 조금은 가벼워진다. 그래서 나는 김애란의 소설을 좋아하고, 그렇게 소설 속에 머무는 내 마음을 자주 들여다보게 된다.
김애란의 소설의 공통점을 찾자면 소설 속 주인공인들의 삶은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슬프거나 힘이 들고, 견딜 수 없는 상실을 맛보지만, 작가가 만든 이야기 속 장치를 통해 추운 겨울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바깥은 여름'을 향해 나아간다. 이번 소설 역시 그랬다. '홈파티', '숲속 작은 집', '좋은 이웃', '이물감', '레몬케이크', '안녕이라 그랬어', '빗방울처럼' 각각의 7편의 글 속에는 현시대의 다양한 계층의 삶의 모습을 공통의 서사로 풀어냈다. 문학은 시대를 반영하는 도구란 말처럼 김애란의 소설 속에는 2020년 전후 수도권 아파트 폭등 전후 부동산으로 영끌을 해 삶이 망가진 부부의 모습, 세입자와 집주인의 심리 묘사, 코로나19가 유행하던 시절, 만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던 그 시기 그룹별 모임을 가졌던 상류층의 단상, 자신보다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여겼던 이가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간다는 말에 마음속에 울렁이는 이질감 등 '이웃'과 '경제', '빈부'와 '가정', 그리고 꼭 빠지지 않는 '상실'과 '사랑', 이 모든 걸 사회란 울타리 속에 부단히 혹은 무심히 살아가는 인간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현대사회에서 나타나는 계층 간의 미묘한 갈등을 대놓고 이야기하는 대신 주인공의 심리 묘사를 통해 자연스레 알아차리게 해 준다. 그래서 난 김애란이 좋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누군가를 사회학자라고 규정할 자격이 사회학자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면, 나는 김애란이 오랫동안 사회학자였고 이제야말로 유감없이 그렇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 책의 서술자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점 중 하나는 그들이 "계급의 표시"에 특히 잘 반응하는 센서를 장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문화자본'이나 '아비투스' 같은 학술 개념 없이도 그와 관련 있는 사회학적 징후들을 포착하는데 뛰어나다."
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작/ p311 해설 부문/문학동네
7개의 소설이 다 좋았지만 그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숲속 작은 집'이었다. 동남아 숙소를 장기 렌트해 휴가를 즐기고 있던 지호와 은주 부부, 어느 날 숙소 부엌 쓰레기통이 묘하게 틀어져 있던 걸 발견한다. 원인이 뭘까 고민하던 부부는 '팁'이 원인일 거란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 뒤부터 그들은 팁과 함께 감사의 메모를 남긴다. 팁의 정도에 따라 숙소의 청결도를 따지는 부부의 대화부터 숙소 물건이 없어진 원인이 팁이 부족해서일까를 따지는 모습까지. 어느 날 숙소에서 사라진 물건으로 메이드에 대한 오해는 더 커지고... 그들이 떠나는 마지막 날, 메이드의 딸은 자신이 그 물건을 떨어뜨려 망가져 가장 비슷한 물건으로 사 왔다며 그들에게 그 물건을 내민다. 사람의 관계가 돈에 얽히는 현실 속에 꼭 돈 때문이 아닌 소통의 오류일 거라는 약간의 희망, 낯선 여행지에서 나조차도 한 번은 느껴본 감정을 작가는 꼭 내 마음을 꿰뚫은 것처럼 글로 옮겨놓았다.
고아원에 있던 아이들이 퇴소를 하면 자립 정착금이란 명목으로 500만 원을 주는데 그걸로 명품 가방을 산다는 이야기를 혀를 차며 탄식하는 상류층의 대화 속에 <홈파티>의 주인공 이연이 내뱉은 말은 오랫동안 여운에 남았다.
-그게 꼭 그 아이들이 철없거나 허영심이 세거나 금융 문맹이어서가 아니에요. 제 생각에는...... 밥은 남이 안 보는데서 혼자 먹거나 거를 수 있지만 옷은 그럴 수 없으니까, 그나마 그게 가장 잘 가릴 수 있는 가난이란 그런 것 같아요. 가방으로. 순간 몇몇 이들이 묘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연은 자신이 뭔가 망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걸 수습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동시에 술을 더 마시고 싶은 걸 꾹 참고 성민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 애쓰는 제 모습을 의식했다. 여기서 혼자 정색하면 연극이 망한다고, 최대한 자연스레 퇴장하자 다짐했다. 이연은 가슴을 펴고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발음으로 밝게 다음 말을 이었다.
-그냥 제 생각은 그래요. 아, 그리고 결례가 안 된다면 저는 조금 이따 일어나 보겠습니다. 내일 또 연습이 있어서요.
안녕이라 그랬어 中 <홈파티>/김애란 작/ p41/문학동네
겉으로는 강하고 밝은 것 같지만 드러내 놓을 수 없는 마음의 무게를 꾹꾹 누르고 살고 있는 나에게 김애란의 소설은 숨통을 트이게 한다. 강렬한 여름의 에너지를 느끼게 한다.
그래도 가영! 할 말은 하고 살자. <홈파티>의 이연처럼, 멋지게!
"그냥 제 생각은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