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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경계 위에서

다시 만난 인연, 다시 쓰는 하루

by 임가영

아침 회의 준비를 위해 부지런히 집을 나섰는데도 불구하고, 늘 먼저 와 계신 분이 있다. “어서 와~.”

언제나 같은 인사말이지만, 외모는 전혀 다르면서도 소설 빨강머리 앤에 나오는 매슈 아저씨처럼 은근한 따스함이 묻어난다. 우리 방에는 내가 수석님이라고 부르는 언론사 선배님이 계신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이라면 아마 짐작하실 바로 그분이다.

얼마 전 언론인클럽에서 충북 언론 5호에 실을 원고 모집 글을 봤을 때는 그냥 지나쳤는데, 엊그제 수석님이 넌지시 말을 건네셨다.

“가영아, 넌 글 쓰는 게 취미니까 평소 쓰던 걸 하나 보내. 난 새로 쓰려니 부담스럽거든.”

전 언론인클럽 회장이어서 더 그러셨으리라. 그 말씀을 듣고 지금까지 취미 삼아 끄적였던 글들을 다시 들춰보았다. 충북교육청 핵심 정책인 <언제나 책봄>을 실천하자는 마음으로 가끔 독서 에세이를 썼는데, 당시엔 괜찮다고 여겼던 글들도 다시 보니 초라하게만 보였다.

퇴근 후 기자 선후배들과 저녁 자리를 갖고 ‘상쾌환’을 한 포 털어 넣었지만,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도 수석님의 말씀이 자꾸 맴돌았다.

‘원고 보내야 하는데….’

그 생각 끝에 결국 자정이 넘은 시간, 노트북 앞에 앉았다. 이런 끄적임의 시간이야말로 나를 웃게 하고, 비로소 진짜의 내가 되는 순간이다. 글쓰기는 내 마음을 돌아보게 하고, 숨 쉬게 한다. 다만 단 몇 줄의 글이 누군가에게 약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독이 되어 칼이 되어 돌아오는 것도 봐온 터라, 지금 이 순간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활자와 조심스레 마주 앉는다.


어차피 수석님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참에 우리 방 풍경을 떠올려 본다. 감성적이고 직설적이며 열정적인 나와 달리, 수석님은 차분하고 냉철하다. 자상함은 덤이다. MBTI로 치자면 내가 ENFJ라면 수석님은 아마 INTJ쯤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수석님은 MBTI를 해본 적이 없어 본인은 잘 모르신다.)

어떤 사안이 터지면 나는 감정이 먼저 반응해 온몸으로 표출되곤 한다. “수석님,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문제 아닌가요?” 하고 목소리가 커질 무렵이면, 수석님은 피식 웃으며 “그래, 가영아. 넌 펄펄 끓어. 난 찬물을 팍 끼얹어 줄게.”라고 하신다. 처음 만난 민원인과의 자리에서도 “제가 저 친구보다 늦게 들어왔습니다” 하며 너스레를 떨어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신다.

연합뉴스를 퇴직한 대선배와 케이블 방송 출신 후배가 한 방에서 근무한다는 것이 처음엔 낯설고 어색했다. 더구나 시각도, 일 처리 방식도, 성격도 달라 초반에는 적응 기간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전직 기자라는 공통의 매개체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순간을 만들어준다. 각자의 의견을 대놓고 개진할 수는 없지만, 문득 눈빛이 마주쳐 공감하는 그 찰나, 서로의 차이가 오히려 힘이 된다. “네 생각은 어떠니?” 하고 되물어주시는 수석님의 질문은 낯선 조직에서 잠시 흔들릴 때마다 나를 붙잡아주는 활력소가 된다.


한때는 힘든 일들로 이곳 대문조차 다시는 쳐다보지 않겠다고 다짐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대문이 내려다보이는 사무실에서, 언론사 대선배님과 함께 일하고 있다. 여러 생각이 스쳐가던 어느 날, 인상 깊게 읽었던 손턴 와일더의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한 구절이 떠올랐다.


우리는 우연히 살고 우연히 죽는 것일까,

아니면 계획에 의해 살고,

계획에 의해 죽는 것일까.

손턴 와일더의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첫 장/ 클레이하우스


나 역시 늘 마음속에 품어온 질문이다. 신에게 묻고 싶은 물음이기도 했다. 우연일까, 계획일까. 생각의 끝에 이르러 내린 결론은 단순하다. 신이 만든 자연 속에서 서로 사랑하고, 주어진 현실 속에서 덜 아파하며 더 감사하며 살아가자는 것.

기자의 길을 걸었던 두 사람이, 기자가 아닌 다른 일로 다시 만나 새로운 자리에서 함께 열심히 일한다는 것.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멀리 돌아왔지만, 결국 우리는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조금은 달라진 마음으로,
여전히 살아 있는 하루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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