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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리 Oct 21. 2023

힘겨운 일은 구름 그림자처럼 가볍게 흘러가길


처음에 오름을 봤을 때는 새로운 생명체를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그다지 높지 않은데 구름이 걸려있는 듯하고, 산이라고 하기에는 낮고 유연하고, 단순히 언덕이라고 하기에는 신비로웠다. 오름이라는 이름도 낯설지만 친근하고, 여러 개의 오름이 서로 모여있는 모습을 바라보면 마음이 안정된다. 이렇게 부드러운 존재가 화산활동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이 믿기 어려울 정도.


등산은 누가 밥을 사준다고 해도 집에 있을 핑계를 대면서도, 오름을 오르는 것은 좋다. 대부분의 오름이 500m 미만이라 올라가는데 채 30분도 걸리지 않는 데다가, 오름마다 다르긴 하지만 올라가는 내내 뒤돌아보면 계속 바뀌는 풍경을 볼 수 있다. 금방 정상에 오르면 작은 노력으로 이렇게 과한 대접을 받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멋진 경치도 감상할 수 있다. 또 오름의 겉모습은 아래에서 볼 때는 비슷비슷하지만 올라가 보면 오름마다 다른 매력이 있다. 제주에는 하루에 한 개씩 가도 일 년이 걸릴 만큼의 오름이 있다고 하니 그것도 은근히 숨어있던 나의 정복욕을 자극하는지 자꾸만 틈만 나면 가고 싶어 진다.


지안이는 가느다란 사슴 같은 다리로도 오름을 잘 올라가고, 유안이는 오르막을 좀 힘들어한다. 아이들과 함께 몇 개의 오름을 다녀봤는데, 등산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와 함께 오르기에는 아부오름이 최고다. 살짝 가파르기는 하지만 아이 걸음으로도 금방 정상에 도착한다. 그 짧은 수고로움을 뒤로하고 만나는 정상의 풍경은 그 어느 높은 산 못지않다. 


8월답게 햇볕 쨍쨍하고 무더웠던 날, 아이들과 함께 처음으로 아부오름을 올랐다. 굉장히 낮은 오름이라 10분이면 정상에 도착한다고 등 떠밀었다. 정말 금방 도착했는지, 아부오름은 다시 와도 되겠다고 하길래 그럼 정상 둘레길도 한번 걸어보자고 했다. 하지만 아부오름은 높이는 낮지만 원형 분화구가 매우 큰 오름이다. 더운 날씨에 한 바퀴 도는 내내 원망이 가득했고, 지칠 대로 지친 우리 셋은 벤치에 앉아 바람에 몸을 맡기며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았다. 


“오름이 도넛처럼 생겼어. 두께는 얇은데 둘레가 엄청 큰 도넛!”

“저기 나무들이 포슬포슬하게 도넛에 뿌려놓은 소보루 같아.”


분화구 가운데에 누가 일부러 모양내서 심어놓은 것처럼, 삼나무들이 강강술래 하듯이 서있었다. 그 원형의 띠 안쪽으로 몇 그루의 삼나무가 방울처럼 모여있는 모습이 귀엽다며 한참 동안 재잘거리며 구경했다. 그러고 나서는 바깥쪽으로 고개를 돌려 정갈하게 나누어진 밭을 바라보면서, 아이들은 거인이 색연필로 그려놓은 것 같다고 했고, 나는 저 중에 한 칸만 내 땅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엄마! 땅에 무슨 엄청 커다란 그림자가 움직여!”

“뭘까? 해와 그림자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잘 살펴봐.”

“구름! 구름이야! 구름을 따라서 커다란 그림자도 같이 움직여!”

“구름은 엄청 가볍고 걱정도 없어 보이는데 그림자가 있네.”


구름은 느린 것 같은데 구름 그림자는 빠르게 흘러갔다. 커다란 밭에 그늘이 지나 싶더니 금방 지나가고 다시 햇볕이 내리쬐었다. 고래처럼 묵직하지만 유연하게 헤엄치는 그림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만약 우리에게 저 그늘처럼 힘겨운 일이 생긴다고 해도, 구름 그림자처럼 가볍게 훌쩍 흘러갔으면. 그저 잠시 그늘에서 쉬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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