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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리 Oct 22. 2023

귤꽃이 귤이 되는 시간


내가 눈치 못 채는 사이에 분명 앵두 만했던 초록귤이 어느새 완전한 귤만큼 커지더니, 드디어 노랗게 익었다. 벌써 10월도 반이나 지나갔으니 그럴 만도 하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다가오는 허함을 귤이 주렁주렁 열린 탐스러운 귤밭의 풍경이 채워준다.


조카도 온 김에 올해 첫 귤을 따러 갔다. 아이들은 귀여운 라탄바구니를 팔에 하나씩 끼고 어떻게 하면 한 개라도 더 담을 수 있을지 미간에 힘을 주고 고민했다. 신중하게 선명한 빛깔로 예쁘게 잘 익은 귤을 골라 귤가위로 꼭지 가까이 똑똑 잘 잘라냈다. 혹시 귤끼리 부딪쳐 서로 상처를 낼까 봐 한 번 더 꼭지를 바짝 잘라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재잘재잘 까르르 온 귤밭에 울려 퍼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속에서, 난 노란 귤에게 다시 하얀 귤꽃으로, 그게 힘들면 초록귤로라도 바뀌라고 주문을 외워본다. 


유안이는 조금이라도 많이 가져가겠다고 작은 귤만 골라 따고, 지안이는 눈빛이 통한 귤만 골라 땄다고 했다. 실온에 며칠 둔 귤을 손바닥 사이에 둥글둥글 굴리다가 오목한 가운데를 엄지손가락으로 푹 구멍을 내어 까먹었다. 남편이 남자친구였던 시절에 귤을 꼭지부터 까는 걸 보고 나와 정말 다른 사람이라는 걸 실감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그렇게 까는 게 귤락도 한꺼번에 잘 벗겨지고 좋은데, 오래된 습관은 역시 잘 안 고쳐진다. 이렇게 씻거나 칼로 껍질을 벗기거나 자를 필요도 없고, 손에 잘 묻지도 않아서 쉽고 깔끔하게 먹을 수 있는 고마운 과일이 또 있을까. 귤껍질을 벗기는 동안 주변에 가득 퍼진 상큼한 향을 마시면서 귤꽃이 귤이 되는 시간을 상상한다. 귤나무가 뿌리내린 거칠고 검은 돌밭부터 여름의 강렬한 태양과 시도 때도 없이 자주 내리는 비가 이 귤 안에 모두 담겨있다. 


우리의 일 년도 그렇게 우리 안에 녹아있겠지. 아직 지안이가 어려서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 입맛이 당기는 상큼한 귤처럼 어디엔가 새겨져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귤껍질이 수북이 쌓여 있다. 딱 한 개만 먹으려고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제주를 생각하면 대부분 바다를 떠올리는데, 나는 파란 하늘에 귤이 주렁주렁 열려 있는 귤밭의 풍경이 가장 그리워질 것 같다. 돌담 너머의 반짝이는 탐스러운 귤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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