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릉역: 일상 속 쉬어가는 숨결
[선정릉으로 향하는 길]
선정릉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왕릉군이다. 조선의 제9대 왕인 성종이 잠든 선릉과 제11대 왕인 중종이 안장된 정릉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어쩐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빌딩 숲으로 빽빽한 강남에 조선의 왕이 잠든 선정릉이 있다니. 혼잡함과 고즈넉함, 시끄러움과 조용함이라는 상반되는 개념이 부딪히는 느낌이다. 대체 ‘선정릉역’은 어떤 곳일까?
선정릉역은 9호선에 위치한 역으로, 9호선은 서울 지하철 최초로 급행 서비스를 제공한 호선이다. 모든 역에 정차하는 일반적인 서비스 외에, 정차하는 역의 수를 제한하여 통행속도를 높여준 것이다. 그래서인지 9호선이라 하면 왠지 치열하고 바쁜 이미지가 떠오른다. 실제로 9호선의 건설 목적은 두 가지였다.
서울의 핵심 지역들을 빠르게 연결하는 것,
그리고 올림픽대로의 만성적인
교통체증을 완화하는 것
이렇게 ‘빠름’을 상징하는 9호선에 역사의 고요함을 보여주는 왕릉이 자리하고 있다니. 눈으로 직접 본 선정릉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함과 기대를 안고 선정릉역으로 바삐 발을 옮겼다.
지하철 개찰구에서 나와 선정릉역의 입구로 향했다. 선정릉(宣靖陵)이라는 지하철역의 글자와 여름의 푸른 내음이 우리들을 반겼다. 나오자마자 고개를 한껏 위로 들게 하는 높은 빌딩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곳에는 어떤 이야기를 지닌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을까?
[선정릉을 누비며]
돌아다니기 전에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건 필수다. 선정릉의 브런치 카페 <428>에는 바깥의 풍경을 보며 식사할 수 있는 테라스가 있다. 프라이빗 룸과 단체 좌석이 있어 다양한 모임을 진행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한적한 선정릉의 분위기가 잘 담겨있는 공간이기에 여유로운 주말 오전을 맛있는 브런치와 함께 만끽하고 싶다면 강력 추천!
[낮의 선정릉]
브런치 카페에서 나와 조금 걷다 보면 <선정릉>에 도착할 수 있다. 앞에서는 푸른 녹지가, 뒤에서는 빽빽한 고층 빌딩이 우리를 반겼다. 몇백 년 전에는 이 빌딩 숲도 전혀 다른 풍경이었을 거라 생각하니 어쩐지 묘한 기분이다. 하늘과 땅만이 유일하게 같은 자리에서, 모든 풍경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다.
서울 한복판, 드물게 큰 규모의 녹지공간인 이곳은 주변의 직장인들에게 소중한 휴식 시간을 제공해 주고 있다. 복잡한 강남 한복판의 거리를 걷다가도 이곳에만 들어오면 고요한 정적이 찾아오는 마법 같은 경험을 선물하는 이곳 선정릉은 도심 속 외딴섬과도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선정릉의 공간들, 이모저모]
선정릉에서 <라움아트센터>로 향하는 길이다. 고즈넉한 돌담길과 푸른 나무가 어우러져 평안한 느낌을 준다. 이처럼 선정릉에는 돌담길로 조성된 도보가 많다. 덕분에 그저 동네를 걸을 때도, 우리는 선정릉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멀게 느껴졌던 길도 이 돌담길만 따라가다 보면 금방이다! 돌담길을 따라 골목으로 들어가면 세탁소, 카페, 정겨운 식당 등 사람들이 정겹게 살아가는 삶의 터전을 엿볼 수 있다.
<라움아트센터>에서 작품을 감상하며 잠시 쉬어간다. 라움은 국내 최초 사회적 교류의 장소로 ‘즐거운 문화의 향유와 관계의 문화’를 추구하는 복합문화공간이다. 웅장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압도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들어 한 장소에서 다양한 문화를 즐기고 경험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들이 주목받고 있다. 복합문화공간의 존재 여부와 조성 정도는 한 지역 주민의 삶의 질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주요 지표가 되었다. 오랜만에 친구와 만나 다채로운 문화생활을 경험하고 싶다면 이곳 라움아트센터를 추천한다.
선릉 카페 <선릉마실길>이다. 인스타그램 속 감성 카페로부터 멀어지고 싶을 때, 커피가 질릴 때, 조용한 분위기에서 전통차와 다과를 즐기고 싶을 때. 선릉마실길에서 한 박자 쉬어가는 건 어떨까? 선정릉 입구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곳은 “선정릉과 가장 잘 어울리는 공간”이라는 인터뷰이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조선시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주는 이곳은 현실을 잊게 하는 타임머신 같은 공간이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손님들의 낙서를 손으로 짚어보며, 각자 어떤 이야기를 남기고 갔는지 읽어본다. 그들의 시간과 추억이 낙서와 함께, 이곳에 남아있었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선릉의 <최인아책방>이다.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입구부터 매료된다. 최인아책방의 출입구는 건물의 오른쪽에 있다. 가운데에 있는 문으로 들어갔다가는 뜬금없이 다양한 옷을 마주할 수도 있으니 주의할 것!
독립서점이라 하면 자그마한 공간에 요모조모 책을 배치해 둔 풍경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그렇지만 최인아책방은 두 개의 층으로 넓게 구성되어 있어 다양한 도서가 테이블별로 큐레이팅되어 있었다. 책방의 한쪽에서는 카페 음료도 판매하고 있으니 음료 한잔과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 딱 좋다.
직접 책방에 방문했던 날, 책방의 한쪽에서는 2인 오케스트라 연주회 리허설이 진행되고 있었다. 덕분에 매장의 BGM 대신, 실시간으로 연주되는 클래식을 들을 수 있는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처럼 최인아책방은 동네 독립서점의 역할을 넘어, 하나의 문화공간으로서 자리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책을 읽을 수도, 모임을 진행할 수도, 음악을 감상할 수도 있다.
[밤의 선정릉]
저녁을 먹고, 다시 <선정릉>의 밤을 마주한다. 같은 자리, 같은 시야. 어두운 배경 속 제 자리를 밝히고 있는 빌딩들은 낮보다 더 눈에 띈다. 밤의 선정릉은 낮보다 더 고요했다. 문득 선정릉 밖의 나머지 세상은 배속을 돌린 것처럼 빠르게 돌아가고, 오직 이곳만 슬로우모션을 걸어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 ‘느림’이 우리 사회에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미덕이 아닐지에 대해서도.
일정을 다 마친 해 질 녘에 방문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벽녘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이곳에서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내쉬어본다. 우리가 함께 본 선정릉의 내부는 온통 ‘초록’이었다. 울창한 나무들과 땅에서 열심히 자라는 풀들까지. 가슴이 답답하고 막막할 때는 푸른 숲을 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말의 이유를 이제야 실감했다. 푸른 숲을 바라보며 눈과 코, 마음, 모든 것이 쉬어갈 수 있다.
[선정릉에서 떠나는 길]
드넓게 펼쳐진 8차선 도로에서 조금만 비켜 나오면, 좀 전의 소음은 어디 갔냐는 듯이 한적한 선정릉의 풍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처럼 역사의 체험과 쉼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가. 시간의 흐름이 잘 보존된 선정릉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공간’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대화를 나누기도, 노래를 듣기도, 그저 쉬어가기도 한다.
낮에 만난 인터뷰이의 말처럼 선정릉에는 ‘다양’하고 ‘다채’로운 색을 지닌 모습이 많았다. 누군가는 바삐 직장으로 향하고, 누군가는 강아지와 함께 산책을 즐기고, 어느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학원에 향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선정릉의 ‘풍경’이 된다.
지하철을 기다리며, 불현듯 가수 곽진언의 미니앨범 ‘정릉’이 떠올랐다. 정릉의 고요함과 평안함을 담아낸 그의 노래를 들으며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정리해 본다. 대낮의 선정릉, 라움아트센터, 최인아책방 등 선정릉의 매력을 이모저모 살펴봤구나 싶어 뿌듯해진다.
복잡한 서울 강남 도심에서도 조선시대 왕조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빌딩에 둘러싸인 동네에서도 고즈넉한 풍경을 보고 쉬어갈 수 있다. 그것이 ‘선정릉’의 매력이다. 일상 속의 쉼을 통해, 그 안에서 함께 나누는 대화를 통해, 우리는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로컬키트 x 웰컴홈즈] 이 콘텐츠는 웰컴홈즈와 함께 제작했습니다.
글·사진: <local.kit> 강혜진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