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시간과 그 흔적
‘철도기점’.
프랑스에 파리 북역(Gare du Nord), 독일에 라이프치히 중앙역(Leipzig Hbf)이 있다면 대한민국엔 서울역이 있다. 기찻길 위를 구르는 거의 대부분의 열차가 이곳에 모였다가 흩어진다.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철도의 심장이다.
1900년 남대문 정거장이란 이름으로 개업한 지금의 서울역은 올해 문을 연 지 124년이 지났다. 1974년 대한민국 최초로 개통한 서울 지하철 1호선도 이곳을 출발해 청량리로 향하는 노선으로 정해졌다. 서울역은 일제 강점기와 산업화 시대를 관통해 서울의 도시 역사를 온몸으로 품어왔다.
그 세월이 긴지라 이곳 주변 청파동, 만리동, 회현동에는 서로 다른 시간이 겹겹이 쌓였다. 조선 시대부터 이어져 온 남대문시장부터 서울 서부역 앞 일본식 적산가옥들, 1923년부터 80여 년간 사용된 신고전 양식의 구 역사(驛舍), 1970년부터 회현동과 만리동을 이어줬던 고가도로, 이리저리 뻗은 좁은 골목길까지. 서울역이 있었기에 이곳은 한 세기 도시의 모습이 겹쳐진 하나의 퇴적층이 됐다.
낡았지만,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바둑판 도시처럼 번듯하게 계획되진 않았지만, 그렇기에 자연스러움이 있다. 시간의 형상이 쌓인 자리엔 도시재생 사업이 벌어졌다. 안전 문제로 차가 다니지 못하는 고가엔 도심 속 녹지공간(서울로7017)이, 그 고가에서 내려오는 램프가 있던 어두운 거리엔 파리를 연상케 하는 여유로운 거리가, 안 쓰는 역사엔 문화 공간(문화역서울284)이 생겨 새 활기를 불어넣는다.
이곳 서울역을 로컬키트가 찾았다. 기나긴 역사만큼 깊어진 도시의 주름살을 지금부터 탐험하려 한다. 이곳은 어떤 모습을 지녔을까.
#1
아스라이 들리는 경적 소리에 고개를 젖힌다. 쏜살같이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실은 객과 눈을 맞춘다. 깜박 – 하는 순간 낯선 그의 형상이 으스러진다. 무엇 하러 이곳을 찾았는지 채 묻기도 전이었다.
#2
교차하는 사람들 속에 나는 서 있다. 우두커니 보내는 시선 너머 방랑하는 영혼들의 묵은 잔상이 남는다. 머무름을 모르는 이들은 무엇이 그리 바쁜지 자꾸 움직인다.
소음 뒤에 정적, 그 뒤에 다시 소음… 우두커니 서 있는 나는 어지러움에 눈을 감는다.
#3
지평선 너머로 너는 사라지고 서성이던 자리에는 가벼운 바람 한 점 남았다. 바람결이 이끄는 대로 자박자박 걸음을 옮긴다. 마치 그래야 할 것처럼, 길은 이어져 있었기에.
걸음걸음 내디디면 소음, 정적, 또다시 소음. 공기의 흐름이 바뀌는 시점을 넘겨짚으면 어긋나기 일쑤다. 어찌해도 이 기찻길은 쉬이 마음을 내어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네가 남겨둔 한낮의 바람에 흔들리며 한참을 걷는다.
#...?
마지막 열차가 간다. 여전히 방랑하는 이들을 남기고 떠난다. 점처럼 작아져 사라지는 네 뒷모습을 바라본다.
선로 곁에 웅크려 내일을 찾아올 너를 기다린다. 쉽게 흩어질 사람들을 싣고 돌아올 너를 기다린다. 적막을 가르고 어둠을 헤쳐 올 네 빛이 그리울 테다.
▲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 1화 중.
상경(上京)의 첫 관문인 서울역. 꿈을 품고 서울에 올라와 보는 첫 풍경은 매우 번잡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건너편으로 넘어가려면 어떤 횡단보도를 건너야 하는지 보이지 않는다. 마치 이제 막 서울에 올라온 이들에게 복잡한 서울살이를 예고하는 듯, 처음 맞이한 그곳에는 수많은 인파와 도로가 서로 뒤엉켜 있다.
이 회색 빌딩 숲속에서 고개를 들면, 도로 위로 교차하는 길 하나가 보인다. 계단을 오르면 어딘가로 향하는 일직선 보행로가 펼쳐져 있다. ‘서울로7017’이라고 하는 이 길의 방향은 딱 하나. 서울역 앞 도로를 건너지 않고 이곳을 걷는 이들에게 잘 올라왔다고 하는 듯, 서울의 풍경을 한눈에 보여준다. 아래 도로가 복잡하게 나 있는 덕분에, 다양한 각도에서 서울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복잡한 서울 속 잠시 숨통이 트인다.
서울역은 늘 바쁘다. 플랫폼에 멈춰 선 기차는 출발을 준비하고 시장 골목에서 풍기는 따뜻한 냄새도 허기진 객들의 발을 오래 잡지 못한다. 하지만 역사(驛舍)의 뒤편 만리재길로 발걸음을 옮기면 느릿한 시간이 흐른다.
기차 소리가 저 멀리서 울리는 이 길은 여행자를 기다리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지나가는 기차소리 아래 펼쳐진 만리재의 이 길이 유영하는 여행객에게 여유를 선물한다.
여행자가 남기고 간 기억 같기도 하다. 아니라면 누군가의 오래된 추억 같기도 한 풍경들이 마음 깊은 곳에 잔잔히 스민다. 방향 없이 방랑하듯 이 길을 걸으면 낯선 사진 같았던 풍경이 마음에 잔잔히 내려앉는다.
이 길에는 오래된 시간이 머물러 있다. 낡은 간판이 걸린 가게, 길모퉁이에 쌓인 계절의 흔적, 그리고 바람이 스치며 남기는 기차 소리까지. 모든 것이 무심히 흘러가는 듯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히 누군가의 삶이 스며 있다.
만리재길은 거창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느릿한 걸음 속에서 당신은 잠시나마 시간의 경계 밖으로 나아간다. 방랑하듯 그리고 스며들 듯 걸어가는 길 위에서 오래도록 잊지 못할 감각 하나가 차곡차곡 쌓인다. 이곳은 그런 길이다.
글·사진: <local.kit> 김민진 에디터, 김서정 에디터, 전성호 에디터, 정회하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