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역에서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15분쯤 달리면 정동진역에 닿는다. 열차 문이 열리면 푸르른 바다내음과 잔잔한 파도 소리가 우리를 맞아준다. 두 개의 철로 사이, 오늘의 해 뜨는 시각을 알리는 안내판이 우뚝 서 있다. 역시 정동진은 해가 가장 먼저 닿는 땅인가 보다. 역을 나서 모래사장을 따라 하염없이 걸어본다. 늘 북적이는 안목해변, 강문해변과는 또 다른, 고요한 정취가 펼쳐진다.
그 고요 속을 걷다 보면 작은 마을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차 한 대 겨우 지날 법한 구불구불한 골목길 사이로 형형색색 지붕들이 도란도란 모여 있다. 그 한가운데, 정동초등학교 운동장이 드넓게 자리 잡고 있다. 매년 8월 첫째 주가 되면 이곳은 별빛 아래 야외 영화관으로 변신한다. 바로 ‘정동진독립영화제’가 열리는 순간이다.
올해로 27회를 맞는 정동진독립영화제는 강릉씨네마떼끄가 주최하는 여름 축제다. ‘별이 지는 하늘, 영화가 뜨는 바다’라는 슬로건 아래, 관객들은 돗자리나 방석을 들고 자유롭게 앉아 간단한 음식과 음료를 즐기며 영화를 감상한다. 상영 중간에는 바다를 산책하거나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영화와 자연이 맞닿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정동진의 풍경과 영화제가 겹치는 이 장면을, 나는 직접 걷고 머물며 기록해 보고자 했다. 그렇게 정동진 곳곳을 거닐며 써 내려간 이 글이 당신에게도 작지만 또렷한 여운으로 남기를 바란다.
[정동진독립영화제, 강릉에서 피어난 싹]
정동진독립영화제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듣기 위해, 오랜 시간 이 자리를 지켜온 이들을 먼저 만나보고자 했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강릉 시내의 ‘신영극장’이다. 한때는 “신영극장 앞에서 만나자”는 말이 약속처럼 통할 정도로 강릉 시민들의 삶에 깊숙이 자리했던 극장이지만, 2009년 멀티플렉스의 등장으로 폐관했다. 이후 시민들의 뜻이 모여 2012년, 독립·예술영화 전용관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지금은 강릉씨네마떼끄가 ‘재미있는 영화, 다양한 영화, 당신의 극장’을 슬로건으로 운영 중이다.
정동진독립영화제 역시 강릉씨네마떼끄의 손에서 시작됐다. 김슬기 사무국장을 통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Q. 강릉씨네마떼끄에 대해 간단하게 소개 부탁드립니다.
A. 1996년, 영화를 좋아하는 강릉 사람들끼리 만든 동아리로 시작했어요. 수도권에 비해 강릉에서 독립영화를 보기 어렵다 보니, 우리가 직접 영화를 공수해 공동체 상영을 하게 되었죠. 이후 영화 교육도 진행하고, 신영극장도 운영하며 정동진독립영화제를 주최하고 있습니다.
Q. 영화제를 운영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정동진은 새해 해돋이와 드라마 ‘모래시계’로 유명한 관광지였어요. 이곳에서 독립영화를 소개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시작했죠. 처음에는 시의 지원도 없이 회원들이 직접 스크린을 세우고 의자를 설치하며 영화제를 준비했어요. 그런데도 첫 해에만 2,500명의 관객이 찾아왔죠. 생소한 독립영화를 상영했음에도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신 점이 놀라웠습니다.
Q. 정동진초등학교라는 장소가 가진 특별함은 무엇인가요?
A. 정동진은 관광지로 유명하지만, 동시에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의 힘이 있는 곳이에요. 초등학교 운동장이라는 장소 자체가 낭만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죠. 스크린 뒤로 산이 보이고, 기차가 지나가면서 만들어내는 풍경이 영화제에 낭만적인 분위기를 더해줍니다.
Q.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요?
A. 첫 해에는 스크린을 직접 세웠지만, 2004년쯤부터 에어 스크린을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에어 스크린은 물줄기를 설치한 뒤 바람을 채워 세우는 방식이라, 설치와 해체에 20명 정도의 인력이 필요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2020년, 영화 상영 40분쯤 스크린이 터지는 사고가 있었던 해예요. 그날 밤, 스탭들이 한 땀 한 땀 바느질로 수선하며 스크린을 보수했죠. 그 해는 영화제 기간 내내 스크린을 계속 보수하며 진행했는데, 영화제가 끝난 뒤 스크린을 자르던 순간엔 아쉬움과 애정이 교차했어요. 지금은 더 크고 좋은 스크린을 사용하면서 시야도 훨씬 좋아졌지만, 당시 에어 스크린의 동글동글한 모습이 영화제의 낭만적인 분위기와 참 잘 어울렸던 것 같아요.
Q. 영화제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일까요?
A. 함께 영화를 보고 감정을 나누는 경험이야말로 이 영화제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초등학교 운동장이라는 특별한 공간에서 관객들은 돗자리를 펴고 자유롭게 앉아 음식을 즐기며 영화를 감상할 수 있어요. 영화 중간에 잠깐 바다를 산책하거나 바람을 맞으며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것도 이 영화제가 가진 특별함 중 하나입니다. 규모는 작지만, 이 모든 요소가 어우러져 정동진독립영화제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줍니다.
Q. 영화제가 강릉에서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A. 강릉에 애정을 가진 분들에게는 큰 자부심의 원천이에요. 서울이나 대도시에 가지 않아도 독립영화와 예술영화를 볼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죠. 강릉 시민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기도 하고요. 몇 십 년 동안 지역민들이 함께 운영해 온 이 영화제는 강릉뿐 아니라 강원도 전체에서도 독보적인 문화 자산이에요.
Q. 영화제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A. 사람이 가장 필요해요. 적극적으로 함께 일할 사람도, 조용히 필요한 의견을 내줄 느슨한 참여자도요. 영화제는 그런 느슨한 연결 속에서 의미를 키워가는 축제니까요.
[정동진2리, 영화제와 마을의 공존]
스크린을 세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이제 그 스크린을 함께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로 눈을 돌려본다.
정동초등학교 운동장을 다시 바라보니, 그 풍경이 조금은 다르게 보였다. 푸른 산에 둘러싸인 운동장은 근처의 드넓은 논밭, 기찻길과 어우러져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영화제를 떠올리며 운동장의 여유로운 공기에 젖어들던 중, 우연히 정동진2리 마을회관을 발견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자 동네 주민들이 오손도손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곳에서 한 어르신의 소개로 마을 노인회장을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정동진2리는 어떤 마을인가요?”
노인회장은 정동진을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 설명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동진은 크게 1리, 2리, 3리로 나뉘어요. 여기가 정동진 2리고, 1리는 기차역 앞, 그 위쪽으로는 등명지구라는 해변 마을이 있어요. 우리 마을에는 48명 정도가 살고, 마을회관에 매일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지내요. 정동진은 해돋이 명소로 유명하잖아요. 해가 뜨는 장면을 보며 소원을 비는 분들이 많아요. IMF 시절에는 사업에 실패하거나 어려운 시기를 겪던 분들이 소주 한 병과 두부 한 모를 들고 와 해돋이를 보며 위로를 받기도 했어요.”
마을과 독립영화제의 관계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독립영화제가 열리면서부터는 더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찾게 됐어요. 특히 젊은 사람들, 그리고 원래 이곳에 살지 않았던 분들이 마을을 채우게 되었습니다. 영화제가 우리 마을에 젊음과 활기를 더해주었다고 생각해요. 영화제처럼, 젊은 사람들이 더 오래 머물며 즐길 수 있는 거리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소음이나 인파로 인해 주민들이 불편을 겪을 수도 있겠다는 나의 예상과 달리, 마을 주민들은 영화제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었다. 오히려 영화제를 함께 만들어간다는 자부심마저 느껴졌다. 정동진독립영화제는 단지 집행위원회만의 행사가 아니라, 정동진이라는 마을 전체가 함께 만들어가는 축제였다. 단순히 영화를 상영하는 행사에 그치지 않고, 영화에 대한 애정과 마을 공동체의 정이 어우러져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스트씨네’, 영화를 사랑한 이들의 새로운 일상]
이 영화제에 이끌려, 정동진에 정착한 이들이 있다. 그들은 이곳에 또 하나의 영화 공간을 만들었다.
마을에서 남쪽으로 십여 분쯤 걷다 보면 정동진 해수욕장 끝자락에 자그마한 서점이 하나 자리하고 있다. 이름은 EASTCINE BOOKSHOP. 간판 아래 놓인 극장 의자 두 개와 상영 시간표가 눈길을 끈다. 영화관처럼 생긴 입구 문을 밀고 들어서자, 벽면을 가득 채운 영화 관련 서적들과 한쪽에 놓인 대형 스크린이 가장 먼저 눈에 들었다. 스크린 앞에는 극장 의자 두 줄이 놓여 있었고, 창문에는 붉은색 암막 커튼이 드리워져 은은한 극장 분위기를 자아냈다. 조용한 극장 같은 분위기 속에서 ‘이스트씨네에서 아침을’이라는 단편영화 상영회가 막 시작되려던 참이었다.
이 공간을 운영하는 이들은 오승희, 박일우 부부다. 그들은 함께 서울에서 서점을 운영하며, 언젠가 서울을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국의 다양한 영화제를 찾아다니던 부부는 정동진독립영화제를 계기로 이곳과 인연을 맺었다. “정동진은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한 매력이 있는 곳이에요. 영화제 기간 머물면서 ‘여기서 서점을 하며 살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게 이들은 정동진에 자리 잡았고, 영화와 책이 어우러진 공간 ‘이스트씨네’를 열었다.
영화 관람 후, 오 대표와 마주 앉아 정동진에서의 삶에 대해 더 이야기를 나눴다.
Q. 정동진으로 이주를 결심하게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A. 어떤 한순간에 결심했다기보다는, 조금씩 ‘어떻게 살고 싶은가’를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좁혀졌어요. 먼저 ‘탈서울’을 고민했고, 그렇다면 나는 어디서 살아야 할까? 그 지역이 나에게 필요하고, 또 내가 없어도 괜찮을 수 있는 곳일까? 이런 질문을 던지며 하나하나 걸러 나갔죠. 그 후에도 2~3년은 서울에 머물며 시간을 들여 고민했어요. 어떻게 공간을 만들지, 어떻게 살아갈지를 계속 그려보면서요.
Q. 정동진에 살아보니 어떤 점이 가장 큰 매력으로 다가왔나요?
A. 다행히 살기 전에도 마을 분위기를 많이 보아서 어느 정도 예상은 했어요. 정동진은 ‘과거의 관광지’인데 지금은 시간이 멈춰 있는 듯한 곳이죠.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운영하며 살아갈 것인가’를 꾸준히 고민하게 됐어요. 일상적인 측면에서는 차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무엇보다 자연과 가까이에서 살고 싶었던 저희에게는 이곳이 충분히 매력적인 장소였어요.
다만,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도 있었어요. 강릉 시내와 정동진 사이의 물리적 거리보다도 마음의 거리가 훨씬 더 멀게 느껴지더라고요. 강릉에 사는 분들이 생각보다 정동진에는 자주 오지 않으세요. 오히려 서울이나 부산 같은 타지에서 이곳을 찾아오는 분들이 더 많다는 게 좀 의외였어요.
Q. 정동진에 더 많은 사람이 머물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A. 정동진에도 더 다양한 문화공간이 생기면 좋겠어요. 단순히 소비하는 공간이 아니라, 누군가의 이야기가 담긴 공간이요. 요즘은 물건을 사는 것보다 경험을 위해 여행지를 찾는 분들이 많잖아요. 그런 분들이 머무르며 정동진만의 감도를 느낄 수 있도록, 경험을 중심으로 한 공간이 더 생기면 좋겠어요. 강릉 시내 쪽은 그런 움직임이 서서히 퍼지고 있는데, 정동진은 아직 그런 흐름이 부족한 것 같아요. 그게 조금씩 채워지면, 이곳을 다시 찾고 싶은 사람들이 자연스레 늘어나지 않을까 생각해요.
Q. 강릉에 오신 뒤 ‘발견’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요?
A. ‘안정적인 일상’이요. 발견이라기보다는 무조건적으로 찾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제때 밥 먹고, 제때 쉬고, 충분히 자는 그런 일상. 서울에서는 그게 정말 어렵더라고요. 여기에서는 자연의 시간에 맞춰 살아가면서도 덜 소비하고, 덜 조급하게 살 수 있어요. 그걸 찾았고, 이제는 그걸 잘 유지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야기를 따라 걷다 보니, 정동진이라는 공간이 내게도 서서히 스며들었다. 정동진을 거닐며 나는 오랜만에 숨통이 트이는 기분을 느꼈다. 줄어드는 인구는 곧 한적함이며, 그 여유는 오히려 ‘영화로운 순간’을 가능하게 한다. 정동진독립영화제의 낭만적인 공기, 이스트씨네의 따뜻한 공간은 결국 이 느슨한 동네가 만든 것이다.
‘소멸’이라는 단어 대신, 나는 ‘머무름’을 떠올린다. 영화가 머무는 마을, 사람이 머무는 공간. 정동진은 그런 마을이었다.
글: <local.kit> 장서린 에디터
사진: <local.kit> 장서린, 오지민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