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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터진마돈나 Aug 19. 2024

백수 딸과 노부부가 사는 법.

나는 엄마를 위해 청소기를 돌리고 아빠를 위해 조기를 구워요.


나는 공식적으로 백수가 되었다.


그동안 치열하고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말할 순 없을 것 같다.

한창 놀 나이엔 원 없이 놀아도 보았고, 꾸준하게 한 우물을 파진 않았지만 제법 열심히 일했던 시절도 있긴 했다.

도전, 실패, 좌절, 도전, 실패, 좌절.. 몇 번의 사이클을 돌고 나니 인생의 반이 훌쩍 넘어갔고

그 사이, 한 자리씩 차지한 성공한 친구들의 소식도 들려왔다.

그럴 때면,

성공보단 망했던 경험이 많은 탓에 내놓을 만한 커리어 대신 '자영업 실패백서'를 무용담처럼 밤새 늘어놓을 자신만 있는 지금의 내 소식이 그들에게 닿을까 신경 쓰였다.

후..

얘들아~ 한때 찬란했던 젊은 시절의 나만 부디 기억해 주렴.




1년간은 백수로 살겠다며 가족과 친구들에게 천명하고 공식적인 베짱이가 된 지 어느덧 9달,

70이 훌쩍 넘은 부모님 댁에 기어들어와 삐댄 지도 4달이 되어간다.

새벽 3시.

드라마, 시사, 세계사, 정치, 유튜브 등 장르의 경계 없이 온갖 콘텐츠를 넘나들며 똑똑해져가고 있는 나의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시간이자 아빠의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이다.

나는 아빠의 달그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잠에 빠져 든다.

아빠가 나에게 용돈을 주면 배시시 웃는 철딱서니 없는 꿈을 꾸면서 말이다.


부모님은 나와 언니가 함께 운영하던 음식점을 5년 전부터 인수하셔서 운영하고 있다.

2년 만에 언니와 내가 give up 하고 도망 나왔던 곳인데 노인네 두 분이 피, 땀, 노력으로 지금껏 잘 운영해 오고 계신다. 아빠는 매일 새벽 3시에 기상해서 엄마와 내가 모아둔 재활용 쓰레기와 음식물을 버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 가벼운 스트레칭과 실내자전거 타기를 하거나 반신욕을 하신 후 전날 엄마가 준비해 놓은 음식을 직접 차려 드시고 새벽 5시 30분 집을 나선다.

오전 11시, 아직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을 때 엄마가 방 문을 열어 오늘은 뭐 할 거냐고 물어온다.

딱히 집안일을 부탁하지도, 늘어져 자고 있는 나에게 혀를 차지도 않는다.

밥 잘 챙겨 먹고, 운동 좀 하고, 글이라도 좀 쓰라는 잔소리라고 하기에도 미안한 잔소리를 고요히 남긴 채 아빠보다 늦은 출근을 한다.

나는 반쯤 감긴 눈을 비벼 뜨고 선심이라도 쓰는 듯 현관 앞에서 엄마를 배웅한다.

"여사님~돈 많이 벌어오세요"

엄마가 "네에~"하며 웃는다.

4달째 이어가고 있는 우리들의 루틴이다.


그렇게 두 분 모두 출근하시면 나는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하고, 스팀으로 집안 구석구석을 반짝반짝 닦는다. 굳이 현관 바닥까지 닦으며 최소한의 양심을 대놓고 어필한다.

엄마보다 먼저 퇴근하시는 아빠와 조기를 구워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조잘조잘 많은 대화가 오가진 않아도 그동안 혼자 드셨을 저녁보단 풍성하지 않았을까 지레 짐작해 본다.

아빠가 이른 잠자리에 드시고 마른오징어에 맥주 한잔을 들이켜고 있다 보면 엄마의 차가 도착했다는 알람이 들린다. 밤비와 나는 쪼르륵 현관 앞으로 달려가 먹여주고 재워주시는 집주인님을 90도 인사로 맞이한다.

"다녀오셨습니까~ 고생하셨습니다~오늘은 얼마를 벌어오셨나요~"

엄마가 웃는다.




영화 '고령화가족'을 보면서 큰 이질감이 없었는데 그때 이미 내 미래의 모습이 투영됐었나 보다.

늙은 부모는 일을 하고, 같이 늙어가는 자식은 백수의 형태로 부모집에 얹혀사는 모양새가 여간 찝찝한 게 아니다. 남보기도 떳떳지 않고. 해서 다시 독립을 해야 하나 싶다가도 결혼도 하지 말고 같이 살자고 꼬시는 엄마를 보면 나랑 사는 게 좋은가 싶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노인네 두 분이 덩그러니 뭔 재미가 있으려나 싶기도 하고.

딱히 나도 불편한 건 없으니 그냥 이대로 쭉 같이 살아볼까 싶다가도 비싼 발뮤다 토스트기랑 에어프라이어를 물어보지도 않고 버려 버리는 엄마를 보면 으휴~안 맞아 안 맞아 고개가 절로 저어지기도 한다.

눈에서 멀리 있을 땐 걱정도 멀었는데, 눈앞에서 늙어가고 있는 노부부를 보고 있자니 쉬 발걸음이 떨어질까 싶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부모님이 나를 데리고 사는 건지, 내가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건지 항변하고 싶기도 하다.




아빠는 내가 사 오는 꽈배기 때문에 살이 쪘다 하시고, 엄마는 내가 먹는 야식을 뺏어먹다가 살이 쪘다 하신다. 엄마가 해주신 맛있는 음식과, 아빠와 함께 먹는 저녁밥 때문에 정작 살이 찌고 있는 건 나인데 말이다.

잔잔하게 투덕거리면서 적당히 양보하고 지내는 우리 셋.

부모님과 지금처럼 평화로웠던 적이 있었나 돌이켜보니 조금은 씁쓸하고 슬프고 화가 난다.

왜 서로의 기운들을 다 빼놓고 나서야 이런 평화가 우리에게 왔을까.

격정같이 흘러갔던 애증의 시간을 도망가지 않고 잘 견뎌내 준 우리들이 고맙기도 대견하기도 하다.

지난 시간의 힘듦을 뒤로하고 서로의 손을 잡았으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떠나기 전까지

나는 엄마를 위해서 집을 반짝반짝 청소하고

아빠를 위해서 조기를 구을 작정이다.


아직도 품 안의 자식인 마흔일곱 철없는 딸과,

같은 인생길 위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는 노부부의 해피엔딩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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