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대 학부 졸업 후 부동산 중개업자에서 UX 디자이너가 되기까지
2020년, 코로나 시기의 정점에서 학부를 졸업했다. 그렇게도 기다리던 졸업이었지만 졸업식도, 파티도 없었다. 3년간의 대학 생활 후 처음으로 학교 캠퍼스를 보러 오기로 했던 아빠의 방문 계획도 취소되었다. 화면을 켜자 미리 녹화되어있던 파워포인트와 연설이 흘러나왔다.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며 집을 청소하다 와인 한병을 따고 쇼파에 누우니 녹화된 화면 속에 수많은 이름들이 지나간다. 그 많은 이름 중에 내 이름도 지나갔겠으나, 애써 찾지 않았다. 환호도, 박수갈채도, 꽃다발도 없이 혼자 보낸 졸업식. 그렇게 나는 6년만에 대학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합격한 시카고 미대는 그 많은 돈을 고작 그림 그리는데 쓰냐는 부모님의 반대에 포기했고, 그래도 학교는 가고 싶고 그림은 그리고 싶어서 무작정 동네 커뮤니티 칼리지 Community College 를 등록했다. 2년간 그곳에서 Associate's degree 를 따고 주립대학교로 편입을 했다. 한국에서도 선화예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내내 켈리포니아 주 장학금을 받아 미술 워크샵을 다녔다. 나의 작품에 항상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마음을 괴롭혔다. 시카고 진학을 포기한 이후 작품 활동에 대한 막연한 불만과 불안, 알게 모르게 미술과 전반적인 모든 창작 활동에 대한 분노가 생겼다. 나는 정말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일 같았고, 같이 합격했던 동기들이 졸업 후 멋진 활동을 이어가며 전시회를 하고, 내가 꿈꾸던 삶을 사는것을 지켜보는것이 너무 괴로웠다. 저들은 복에 겨워서 자신들이 갖고있는 삶이 얼마나 축복받은 삶인지 전혀 모른다. 나는 아무 죄 없는 그들을 부러워하고, 동경하고, 우상시하고, 또 동시에 경멸하고 저주했다.
편입하여 시작하게 된 주립대학교에서 나는 그들을 향한 저주를 나를 향해 쏟아붓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프랑스, 한국, 미국을 다니며 작품들을 출품했고 전시회도 많이했다. 갤러리에서 해달라는 그림을 그냥 그렸다. 내가 하고싶은 작품도 아니었고 나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작업도 아니였다. 갤러리에서 하라는 인터뷰를 하고 몇몇 신문사에 기사도 났다. 하지만 그럴 수록 내 안의 분노는 더욱 커져갔고 그림은 내 마음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중간중간 휴학을 하며 허송세월을 보냈다. 빨리 졸업을 해서 학교고 그림이고 다 떼려치는게 내 인생 최대의 목표였다. 그러다 결국 졸업을 앞 둔 2020년, 텅 비어있는 흰색 캔버스 앞에만 서면 공황에 시달렸다. 숨을 쉬기 힘들었고, 팔이 저릿저릿하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울음이 그치지를 않았다. 붓을 잡으면 손이 덜덜 떨렸다. 불안과 공황에 녹초가 되던 참에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술 파티를 거하게 했다. 다음날 눈을 떴는데 설명할 수 없는 공포감에 압도되어 숨을 쉬기 힘들었고 당장이라도 심장이 터져 죽어버릴것만 같았다. 혼자 집에 있는 것이 힘들어 집밖으로 뛰쳐나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한 손에는 911을 누르고 죽을 것만 같으니 살려달라고 외쳤다. 응급실에 가서 검사를 다 했지만 모든 수치가 정상으로 나왔고, 공황 및 불안 장애라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그 후 불안증과 공황 발작을 다스리기 위해 술을 모두 끊고 아침마다 숨쉬기와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래도 하루에 몇번씩 불안이 찾아왔지만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나니 조금은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게되었다. 그림 그리는 것은 여전히 힘들었지만 내 사정을 들은 담당 교수님이 작품을 통해 불안함을 내 안에서 밖으로 꺼내놓는 연습을 해보라며 용기를 주셨다. 그렇게 나는 어찌저찌 모든 작품을 완성하여 졸업 작품을 끝냈다. 졸업 전시도 코로나의 여파로 모두 온라인으로 진행되었다. 전시장은 커녕 같이 졸업 하는 친구들 작품도 사진으로만 봤다. 학교 인스타그램에 작품 사진 세장 올려주는 것이 전부였다. 졸업 전시가 생에 첫 전시였던 친구 하나는 무척이나 실망했지만, 엉망이었던 내 작품을 전시장에 걸지 않아도 된다는 게 오히려 나한테는 위로가 되었다. 복잡 미묘한 감정이었지만, 후련함이 가장 컸다.
그렇게 대학생활을 마치고 나니 눈앞에 또 다른 골칫덩어리가 생겼다. 미술 전공자로서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것인가? 갤러리에서 인턴쉽을 하면서 봤던 작가들의 삶은 녹록치 않아보였다. 작품 하나당 50,000 달러, 한화로는 6,500만원 상당의 가격대를 부르는 작가였는데 갤러리에서 수입의 50%를 가져가고, 세금을 다 제하고 나면 그렇게 큰 돈은 아니었다. 더 큰 난제는 다음 작품이 언제 팔릴지 아무 기약이 없기 때문에 예측하기 힘든 수익구조였다. 다른 작가 한분은 그림을 보관하는 창고에 화재가 나 3년치 작품들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또 다른 작가는 큰 회사에 저작권 등으로 소송을 받아 그간 번 돈을 그대로 반납해야 했다. 어차피 그림은 떼려치기로 생각했었기 때문에 이런 모습들은 내 마음을 더 굳건히 해주는 케이스 스터디가 되었다. 다른 곳에 취업을 하고 싶었지만 모든 인턴쉽과 대학교 활동이 모두 창작 활동과 갤러리에 초점이 맞추어져있어 도무지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학교 마지막 해에 무작정 "내 집 마련"이 하고 싶다는 생각에 쉬는 시간과 방학을 이용해 부동산 중개업 자격증을 땄는데 그 생각이 났다. 자격증을 따던 같은 달, 집 한채를 팔아 6,000 달러 상당의 수수료를 번 기억이 있다. 800만원 상당의 돈이었다. 금액보다 더 인상 깊었던 것은 바이어를 너무 쉽게 찾았다는 것이었다. 보고 싶은 집이 있다며 바이어에게 연락이 왔고, 그 집 앞에서 만났는데 부부와 두 아이와 그 가족의 반려견까지 한 가득 차에 타고 나타나서는, 대뜸 "저희 중개사로 일해주시죠" 하는 것이였다. 처음이었고 나는 내 집을 사 본 경험도 없기 때문에 바이어가 물어보는 질문에 대한 답이 모르는게 천지였다. "제가 한번 더 알아보고 말씀드릴게요" 라고 시간을 벌어두고 브로커에게 달려가 이럴때는 어떤 식으로 대답해주어야 하는지 묻고 다시 쫓아가 대답해주기를 계속 반복했다. 심지어 부동산 수수료는 계약이 끝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엄청난 시간을 낭비하고 고객에게 뒤통수 당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바이어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와 같이 일하고 결국에 계약 성사까지 채 한달이 걸리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아직 학교를 다니고 있었기에 멈췄지만 좋은 생각인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미술 전공자로서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덤벼볼만하고 잘 벌 수 있는 일인것만 같았다.
그 길로 부동산용 SNS 계정을 만들어 홍보를 하고, 전단지를 만들어 뿌리기 시작했다. 마음에 드는 동네에 가서 직접 문을 두들기며 내 소개를 하고 집을 팔 의향이 있는지 묻고 다녔다. Notary 자격증도 함께 따서 부동산 관련 공증일도 도맡아 했는데, 서류 공증을 한번 마칠때마다 서류 종류에 따라 80불에서 200불 정도를 받았다. 문제는 체력이였다. 부동산 공증은 특히 시간에 예민한 것들이 많아서 계약 성사를 위해 자정이 넘기 전까지 공증을 반드시 해야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그런 경우 저녁을 포기하고 밤 10시 11시까지 온 동네를 서류를 들고 뛰어다니는 경우가 허다했다. 모든 서류를 배달 라벨을 붙히고 정리하고 집에 들어오면 새벽 1시가 넘는 날도 많았다. 부동산 SNS 계정도 브랜딩에 서툴던 터라 키우기가 힘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다 배움의 일부분이였지만 그 당시에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너무 힘들었다. 내가 나이 어린 젊은 에이전트라는 것도 강점으로 브랜딩을 해서 마케팅 전략을 짤 수 있었지만, 내 딴에는 경험 없는 어린애라는 인상을 줄거 같아 일부러 옷도 노숙하게 입고 다녔다. 바보같은 짓이였다. 심지어 처음 집을 팔았을 당시 대학생이었고, 대학생 그대로의 모습으로 손님을 만나 계약을 성사 시켰던 경험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진상 손님도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몇달동안 40채가 넘는 집을 보고 잠수를 탄 사람도 있었고 도움을 다 받고 나서는 친척이 자격증을 땄다며 정말 고마웠다는 메세지와 함께 다른 사람과 집을 사는 경우도 있었다. 가장 힘들었던 일은 내가 가장 친한 친구라고 믿었던 친구가 나와 집을 여러채 보고는 인터넷에서 찾은 중개업자와 만나 덜컥 계약을 해버린 것이었다. 한달 반동안 집을 찾아서 보여주고, 부동산 관련된 모든 질문에 대답해 주고, 내 쉬는 시간도 반납하며 도와줬던 그 친구로부터 받은것은 집 찾는 것을 도와줘 고맙다며 보내준 케이크가 전부였다. 새로 산 집에 놀러오라며 초대를 했을때는 정말 울고싶었다.
코로나 시기와 겹쳐서 마스크 관련해서도 참 문제가 많았다. 미국은 한국과 분위기가 많이 다르기도 했고, 특히 내가 사는 동네는 마스크를 쓰면 겁쟁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처음 클라이언트를 만날때 마스크를 쓰고 나갔다가 언론에 놀아나는 겁쟁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고,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고 난 이후에는 "그래도 너네들은 코로나를 갖고오지는 않았으니까" 중국인보다 낫다는 비아냥도 칭찬도 아닌 말을 일상으로 들었다. 그런 말들이 하나 둘씩 쌓이면서 상처가 되고 그 상처가 점점 커져서 우울이 되었다. 말에 치이고 상처받는 나를 보니 나의 나약함에 대한 방증인것만 같았다. 벗어나고 싶었다. 지독한 말들로부터 해방되고 싶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무엇일까 다시 생각해보았다. 그림을 다시 그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창의적인 일을 하고싶었고, 창의적인 일을 하면서 배고프고 싶지는 않았다. 무작정 구글에 들어가서 검색을 했다. Creative jobs that pay well. 창의적이고 돈도 잘버는 직업! 열개 남짓의 직업들이 검색 결과 제일 위에 보였다. 그 중 1번이 UX Designer 이었다. UX 디자인? 그게 뭘까? User Experience의 줄임말 UX 는 말 그대로 유저의 경험을 연구하고, 그 연구를 바탕으로 최적의 상품을 디자인 하는 것이다. 실제 UX 디자이너의 일상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 검색해보니 프로덕트(Product), 엔지니어링, 마케팅, 비즈니스, 법률팀 등 다양한 팀과 협력하며 파워포인트 등으로 디자인 발표 및 디자인 관련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20-30% 정도의 시간은 실질적인 디자인 업무를 하는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재미있어 보였다. 평균 연봉을 검색해봤다. 억대 연봉은 물론이고 어릴적 상상만 했던 실리콘 벨리 스타트업들이나 우리가 흔히 들어볼 수 있는 각종 회사들에서 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회사에서 지원해주는 각종 베니핏들이 너무 매력젹이었다. 당장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찾아보다 General Assembly 라는 부트캠프를 알게됐다. 주변 지인중에 이미 UX 디자이너로 일하는 분이 있어 물어보니, 꽤 많이 알려진 프로그램이라며 믿을만 하다고 추천했다. 3개월간 10,000불이라는 적지 않는 금액이였지만 당장 밖에 나가서 전단지를 날리고, 사람을 상대하며 상처받는 것보단 백번 나은 선택이었다. 프로그램 시작하기 직전 시기적절하게 집을 한 채 더 팔아 6,000달러 가량의 수수료도 벌었다. 당장 대출을 받고 2주만에 프로그램에 등록했고 한달 후 첫 수업을 시작했다. 3개월간 매일 아침 9시에서 5시,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수업 중 점심 시간 전까지는 UX 관련 컨셉과 역사, 각종 방법론 등에 관한 강의를 듣고, 점심 시간 후 부터는 주어진 프로젝트를 완수하고 짜여진 팀과 모여서 디자인을 끝내는 방법으로 세달동안 일상이 온통 UX 관련된 정보로 꽉꽉 채워졌다. 프로그램을 지도하셨던 선생님은 UX로 석사까지 마치신 분인데 석사에서 배우는 과정이나 프로그램에서 가르치는 내용이나 결론적으로 같은 내용이라며 혹시라도 취업에 도움이 된다고 석사를 또 한다거나 하는 일은 고민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 얘기를 들으며 비싼 프로그램 비용을 애써 정당화하기도 했다.
3개월간의 부트캠프 기간이 끝나갈 무렵 즈음, 포트폴리오 사이트에 케이스 스터디를 하나 둘 채워넣고 이력서도 손을 보기 시작했다. 케이스 스터디들은 2-3주 간격으로 학생들끼리 만들었던 작은 프로젝트들로 실질적으로 사용되지 않은 프로젝트들이였지만, 그 중에 가장 잘 된 작품으로 팀원들과의 커뮤니케이션과 팀워크, 역할분담 등에 초점을 맞추고, 최대한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툴들을 동원해서 그럴듯 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잘 된 케이스 스터디와 포트폴리오 사이트들을 내 사이트와 대조해가며 좋은 점은 배끼고 다듬어 갔다. 문제는 이력서였다. 식당 알바, 갤러리 인턴쉽, 영상 편집일, 전시회 경험, 부동산 중개업, 부동산 공증 등 공통점이라고는 없는 경력들과 UX와 상관없는 순수미술 전공, 3개월간의 부트캠프. 이 이력서를 들고서는 어딜가도 가능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장이라고 생각하고 이력서를 본다고 하더라도 이런 사람은 뽑지 않을것만 같았다. 그래서 지내던 집을 정리하고 부모님네 집에 들어가서 3개월동안 얹혀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기간동안 닥치는데로 일거리를 찾았다.
가장 처음 한 일은 프로보노 pro bono(전문가가 자신의 전문성을 자발적이고 대가 없이 공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뜻함) 일을 찾는 것이었다. UX 디자이너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버짓은 부족한 비영리 단체들을 찾아갔다. 소득이 낮고 언어가 잘 되지 않는 라틴계 이민자들이 미국 건강 보험에 지원하는 과정을 도와주는 아리조나 비영리 단체에서 질문 답변을 자동으로 받고 회원 관리를 할 수 있는 플랫폼 디자인 하는 일, 뉴저지에 위치한 학습장애(learning disabilities)가 있는 아동과 성인들에게 교육과 취업 훈련을 제공하는 비영리 단체의 마케팅 및 웹사이트를 리뷰하고 Information Architecture(정보 아키텍쳐)를 집중하여 재정비하는 일들이 가장 처음 했던 일이었다. 그 후 이 경험들을 이용해서 이력서를 고쳐나갔고, 포트폴리오에도 케이스 스터디로 편집하여 집어넣었다. 그러자 부트캠프 졸업 후 두달째 되던날, 두달간의 짧은 계약일을 따게되었다. 시간당 36불, 주 40시간동안 세개의 랜딩 페이지들을 각각 리서치하고, 문제점을 파악해 재디자인하는 일이었다. 큰 금액은 아니었지만 돈을 받고 UX 디자인 일을 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고, 더 큰 회사들과 인터뷰할때 대화 소제와 자신감을 심어주는데에 큰 역할을 했다.
이 세가지 UX 관련 경험을 가지고 취업 전선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서 이력서를 제출하기 시작한지 한달여만에 네군데의 회사와 인터뷰를 하게되었고, 그 중에 세 군데는 Final round 인터뷰까지, 마지막으로는 두군데 회사에서 Offer letter 를 받게되었다. Offer letter 는 근로 계약서 또는 연봉 계약서라고 볼 수 있는데, 보통 두군데 이상의 회사에서 오퍼를 받게 되면 양측 회사와 잘 합의를 해서 연봉 협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캘리포니아와 아리조나주에 있는 회사에서 각각 오퍼를 받았는데, 같은 금액이라면 생활비가 훨씬 낮은 아리조나 주를 선택했다. 내가 졸업한 학교도 아리조나 주립 대학교였기 때문에 주변에 대학 동기와 친구들이 많이 있었고 피닉스에서의 생활이 너무 즐거웠던 기억도 한 몫 했다. 그렇게 우울함과 무기력함 끝에 UX 디자인으로 전향하기를 결정한지 6개월, 부트캠프를 마친지 딱 3개월만에 첫 1억 연봉을 받고 나의 UX 디자인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었다.